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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중앙일보 2015.10.20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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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부산국제영화제 ]
영화, 그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뜨거운 스물 그 영화로움에 건배

축제는 끝났다. 열흘간(10월 1~10일) 부산을 들썩이게 했던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도 이젠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성년을 맞은 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부산을 찾은 국내외 게스트의 면면도 화려했다. 무대 인사와 오픈 토크 등 영화인과 관객이 만나는 행사장은 어디에서나 인파가 흘러 넘쳤고, 상영작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말 그대로 영화에 대한 경배의 시간이었다. 축제를 뜨겁게 달궜던 화제작의 감독과 제작자·배우들이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 또한 예년보다 더욱 진솔하고, 다채로웠다. 쉽사리 식지 않는 그 감동과 여운을 여기에 전한다.


‘필름시대사랑’ 장률 감독&박해일

‘경주’(2013)의 오래된 무덤 사이를 유유히 거닐었던 장률 감독과 배우 박해일이 다시 만났다. 이번엔 영화에 대한 영화 ‘필름시대사랑’(10월 22일 개봉)에서다. 총 4장(1장 ‘사랑’·2장 ‘필름’·3장 ‘그들’·4장 ‘또 사랑’)으로 구성된 70분 분량의 영화는 정신 병원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 촬영을 한참 지켜보던 조명부 퍼스트(박해일)는 감독(김학선)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다. “감독님, 이 영화 이렇게 찍으면 안 됩니다. 감독님은 사랑을 믿으세요? 감독님은 사랑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찍으시면 사랑을 모욕하는 거예요. 니들이 영화를 알어?” 이 난수표 같은 질문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필름 시대를 거쳐 온 감독과 배우가 영화의 본질을 묻고 있는 영화, ‘필름시대사랑’은 적잖이 실험적이라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되묻게 되는 신비로운 작품이다.


-‘경주’에 이어서 두 번째 만남입니다.

장률(이하 장) 첫 번째 영화에서 서로 밉지 않았겠죠. 한 번 만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더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요. 어차피 영화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아직 박해일이란 친구를 만나서 할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랑을 믿습니까’ 같은(웃음).

박해일(이하 박) 할 이야기가 없으시면 안 찾으실 건가요? 하하. 감독님이 불러주셔서 자연스럽게 출연하게 됐어요. 아마도 박해일이라면 영화 속에서 저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생각하신 것 같아요.

-맞나요?

장 음, 그런 것 같아요. 하하하. 사실 조명부 스태프가 던지는 질문은 영화 현장에서 모든 스태프가 할 수 있는 질문을 함축한 거예요. 현장에선 감독이 모든 걸 결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태프나 배우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저는 항상 생각해요. 저들이 속으로 ‘너 영화를 알아?’라고 묻고 있을 거라고. 이번 영화에서 저는 질문을 받는 대상인 거죠.

박 사실 저도 연기를 하면서 계속 되묻게 되더라고요. ‘나는 사랑을 믿는가. 나는 영화를 알고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건가.’ 제 개인적인 물음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흥미로운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은 사랑을 믿나요.

장 사실 조명부 스태프도 질문을 해놓고 답을 말하진 않잖아요. 다시 말해서 그 질문 자체가 소중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의 원조인 나에게 되묻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계속 질문하게 놔둬요(웃음).

-감독님의 영화는 항상 공간이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이번엔 왜 정신 병원이었나요.

장 영화 촬영 현장은 어딘지 모르게 정신 병원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정신 병원은 시간과 공간이 고립되어 있잖아요. 영화도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거든요. 현장에 있다 보면 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 같기도 해요. ‘경주’를 찍을 때도 나는 왜 이런 영화를 찍고 있는가 계속 묻고 있더라고요. 한국에 온 지 3년 반 됐는데, 정말 앉으나 서나 병에 걸린 것처럼 영화 생각만 했어요. 베이징에 살았을 땐 다른 인간 관계가 많으니까 영화 이야기를 할 시간이 적었는데, 한국에 와선 강의할 때도 사람 만날 때도 영화뿐이죠. 그래서 이런 영화를 찍게 된 것 같아요.

장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필름 시대를 추억한다. 2장을 보면 분명해진다. 촬영이 끝나버린 텅 빈 현장을 응시하는 2장은 실제로 16㎜ 필름으로 찍었다. 장 감독은 “1장을 디지털로 찍었다면, 2장에선 같은 공간을 필름으로 찍으면서 그 질감의 차이를 들여다 본 것”이라고 말했다. 3장은 출연 배우들이 과거에 필름으로 찍은 영화들을 되짚어본다. 박해일의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 감독), 문소리의 ‘박하사탕’(2000, 이창동 감독), 안성기의 ‘화려한 휴가’(2007, 김지훈 감독), 한예리의 ‘귀향’(2009, 안선경 감독)의 장면 일부를 가져와 이어 붙여 1장과 이어지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장 지금은 필름이 다 없어졌잖아요. 하지만 이 배우들은 다 필름 시대에서 건너왔거든요. 필름 속에서 배우들의 감정은 어떻게 나타났고, 우리에게 필름은 어떤 기억과 정서로 남아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박 저도 영화를 보면서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 떠오르더라고요. 사실 디지털로 오면서 돌이킬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필름은 갈아끼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조명 세팅도 다르고요. 전체적으로 속도가 빨라진 거죠. 그러면서 분명 알게 모르게 놓치고 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4장은 1장의 내용이랑 거의 같은데 배우 없이 공간만 찍고, 그 위에 목소리를 입혔어요. 영화에서 배우를 제거했지만, 마치 배우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박 맞아요. 저는 영화의 완성본을 보고 나서 인물들이 영화 내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사실 영화는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담잖아요.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어떤 공간, 소리, 인물, 정서를 이 영화가 소환하는 것 같아요. 그런 빛바래고 쓸쓸한 느낌이 ‘필름’과 함께 다가오더라고요.

장 해일씨, 이야기 정말 잘했어요. 우리 영화 제목이 ‘필름시대사랑’이잖아요.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건, 무성영화에서 기술이 발전해 유성영화로 넘어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필름과 디지털은 질감이 달라요. 필름이 없어진다는 건 어떤 질감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필름은 낡고 닳기 때문에 갖는 고유의 질감이 있어요. 그 질감에 추억이 생기잖아요. 사람이 늙어서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죠. 100년이 지나도 똑같은 디지털은 보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 나는 언젠가 필름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의 영화에는 실재와 환상,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독특함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15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해왔지만 여전히 신비롭고 궁금한 배우인 박해일씨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장 그런가요? 해일씨의 연기는 질리지 않아요. 저 사람 도대체 뭐지? 항상 새로운 얼굴이 나오는 배우예요. 제가 해일씨하고 데뷔 시기가 같아요. 2001년에 저는 막 단편영화를 연출한 감독이었고, 해일씨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임순례 감독)를 찍었죠.

박 감독님을 처음 뵌 게 ‘경주’ 때가 아니에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출연했을 당시 뒤풀이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감독님도 계셨대요. 그때 저는 너무 취해서 감독님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어요(웃음).

장 제 옆자리에 한 소년이 혼자 앞을 보고 앉아 있더라고요. 어떤 사람과도 대화하지 않고 조용히. 그 존재감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어요.

박 장 감독님과의 작업은 매번 기대되고 호기심이 생겨요. 긍정적인 고민을 하게 만들죠. 그건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그럼 세 번째 작품도 같이 하시는 건가요.

박 개인적으론 꼭 작품이 아니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계속 같이 가고 싶어요.

장 나는 내 영화에 박해일만 나오면, 그 영화가 다 좋을 것 같아요(웃음).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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