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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역 메운 책… 책… ‘지식 환승역’으로 재탄생

중앙선데이 2015.10.18 00:33

1 안위크의 미술가 피트 다드가 제작한 벽화. 43명의 영미문학가들이 독자를 맞고 있다.

주소 Alnwick Station, Northumberland NE66 2NP England 전화 44(0)1665 604888 www.barterbooks.co.uk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책에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 떨어뜨린 게 미안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어린 우리들에게 책을 함부로 넘어다니지 말라고 가르쳤다. 책이 귀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책은 정신이고 생명이란 말씀이었다.

 

[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 영국 안위크의 바터서점

나는 1980년대 초 영국을 여행하면서 지금은 국가문화재가 된 윈스턴 처칠의 생가를 찾아갔다. 수많은 책이 방마다 가득 꽂혀 있었다. 경이로웠다. 이런 책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2차 대전을 이끈 정치가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잉글랜드의 북단 노섬벌랜드 주의 작은 마을 안위크에 바터서점(Barter Books)이 있다. 저 변방이지만 유럽에서 큰 중고서점의 하나다. 91년에 안위크 출신의 스튜어트 맨리와 미국 미주리 주 출신의 메리 맨리 부부가 문을 열었다.

 


책의 바다, 책의 숲이다. 50만 권을 갖고 있는 바터에 들어서면 책의 나라 영국을 실감한다. 책을 사랑하고 책 읽기를 일상으로 누리는 영국인들이기에 저 기라성 같은 문학예술가들을 배출해냈을 것이다.

 

 

 

2 바터서점을 찾는 독자들은 책방 한 가운데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는다.


독자가 가져오는 헌책 하루 100박스우선 ‘바터’라는 책방 이름이 흥미로웠다. ‘물물교환’하는 책방이라니! 독자들이 읽은 책을 갖고 온다. 하루에 갖고 오는 책이 100박스나 된다. 직원들이 갖고 온 책을 검수해서 교환권을 준다. 독자들은 이 교환권으로 다른 책들을 갖고 간다.

 


나는 돈으로 물건을 사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내가 만든 물건과 다른 사람이 만든 물건을 교환하는 그런 인간적인 삶을 생각한다. 가끔 그런 일을 해보기도 한다. 이진경 화가의 달그림을 우리가 펴낸 인문학 책과 교환한 바 있다. 노혜경 시인과는 그가 손수 만든 비누와 한길그레이트북스를 교환했다. 우리는 물물을 교환하면서 아주 즐거워했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에든버러 행 열차를 타고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해 세 시간 사십 분을 달려 안머스 역에서 내렸다. 택시를 타고 십 분을 달려 바터서점에 도착했다.1850년에 문을 연 안위크 역은 1887년에 건축가 윌리엄 벨의 설계로 새로 지어졌다. 당시 노섬벌랜드 공작이 이곳을 방문하는 귀족들을 환대하기 위해 3000㎡의 공간으로 마을 규모에 비해 크게 개수한 것이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철도망이었던 ‘NER’(North Eastern Railway) 라인의 주요 역으로서 런던과 에든버러를 연결했다. 귀족과 노동자가 함께 타고 내렸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다. 1968년 역은 폐쇄되었다. 폐허가 되어 있던 역사가 책과 책방으로 다시 살아났다.

 


주민 7000명이 사는 안위크는 영화 ‘해리 포터’를 촬영한 안위크 성으로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고서와 헌책을 갖고 있는 바터서점은 관광지 안위크 성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는다. 2014년에는 39만5000명이 다녀갔다.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는 기차, 그 기차가 다니는 철길, 사람이 타고 내리는 철도역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하지 않을까. 118년 동안 온갖 사람과 사연과 사물을 실어 나르던 그 기차역에, 이제는 사람들이 읽었던 고서와 헌책이 운집하고,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서점이 되었다. 서점이 된 기차역, 지난날 사람들의 삶과 사연을 보라색으로 물들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이야기를 공급하는 책의 시장이 되었다.

 


벽돌의 견고함으로 바터서점의 건물 외양은 옛날 그대로다. 열차가 서고 떠나던 그곳엔 서가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서가 사이사이에 푹신한 소파가 있다. 유리지붕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책 읽는 독자들의 얼굴을 밝힌다. 대합실들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되었다. ‘NER’이라고 새겨져 있는 난로들이 저 옛날 기차역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3 기차가 서던 철로 위에 서가가 설치되었다.


43명의 영미 문학 작가를 벽화로 제작독서에 몰두하는 여성은 아름답다. 영국 남자 스튜어트는 미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독서에 빠져 있는 미국 여자 메리에게 반했다. 한 남자가 책 읽는 한 여자에게 반함으로써 바터서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영국에 유학한 바 있는 메리는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첫 만남으로 두 사람은 곧장 결혼까지 갔다. 남편 스튜어트는 폐지된 안위크 역사의 일부분을 빌려 장난감 기차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권유했다.“당신이 좋아하는 책을 위해 이 공장에 책방을 해보면 어떨까.”

 


스튜어트는 아내를 위해 공장을 닫고 아내와 함께 서점을 시작했다. 부부는 역 대합실에 있던 다섯 개의 난로를 수리하여 다시 불을 지폈다. 손님들이 따뜻한 난로 앞에서 차를 마시면서 책에 빠져들게 하는 일이었다. 공간도 계속 넓혀나갔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열 배로 넓어졌다. 주제별로 책이 꽂혀 있는 서가 위로는 스튜어트가 제작한 장난감 전동기차가 조잘대면서 돌아다닌다.

 


책과 책 읽기를 사랑하는 메리가 읽은 책 가운데 그녀를 감동시킨 시 구절들을 서가의 아치에 붙였다. 바터서점 안으로 발을 딛는 사람들은 이 자상한 메시지에 주목한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질서, 아름다움, 화사함, 고요, 그리고 관능이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 '여행에의 초대' 한 구절이다.

 


“육체는 슬프다, 아아!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바다의 미풍’ 한 구절이다.

 


어느새 문학적인 인간이 된다. 어딘가를 떠나는 사람들의 설렘. 미지를 탐험하는 여행자들의 여심(旅心)이 서점 안에 가득하다. 바터서점을 찾는 사람들은 책과 함께 그리움을 찾아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할 것이다. 새 책의 까칠함이 아니라 고서와 헌책의 관용을 느낀다.

 


메리는 노섬벌랜드의 미술가 피트 다드에게 위대한 영미문학가 43명을 벽화로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부탁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된 이 벽화는 서점의 입구 위쪽에 설치되어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다드의 벽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작가들과 눈맞춤할 수 있다.

 

 

 

4 서점 외관. 5 사람들에게 책을 안내하는 일이 무엇보다 즐겁다는 매니저 데이비드 챔피언.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토니 모리슨, 윌리엄 포크너, 사뮈엘 베케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크 트웨인, T.S. 엘리엇, 로버트 스티븐슨, 존 키츠, 찰스 디킨스, 도리스 레싱,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쇼, 랭스턴 휴스, 월트 휘트먼,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 찬란한 이름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바터서점은 정녕 풍요로운 책과 독서의 향연장일 것이다. 바터에서 10년째 일하는 데이비드 챔피언은 말한다.

 


“세상에 이런 행복한 곳이 어디 또 있을까요?”

 


투자회사 로스차일드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기 위해 거길 그만두었다. 아내가 저세상으로 떠나기까지 5년 동안 돌보았다. 그러곤 바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책을 안내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즐겁습니다. 나의 후반 생을 책방에서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한동안 영국에서는 전자책이 종이책을 이길 거라고 전망했지만 그 전망이 전혀 빗나가고 있다는 것이 챔피언의 분석이다.

 


“5년 전만 해도 전자책을 외쳐댔지만, 종이책을 찾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바터를 찾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 속의 바터’를 만든 포스터 한 장좋은 책을 확보하기 위해 스튜어트와 메리는 고서 옥션에도 부지런히 참가한다. 2000년 낙찰받은 헌책 더미 속에서 희한한 아이템이 나타났다. “평정심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라”(Keep Calm and Carry on)고 인쇄된 포스터 한 장이 나왔다.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디자인된 이 포스터로 ‘세계의 바터’가 되었다.

 


2차 대전 때 영국 정부는 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 종류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두 포스터는 배포했지만 세 번째 포스터는 영국이 나치에 점령될 경우에 배포하도록 했는데, 나치의 패배로 이 포스터는 배포되지 않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했던 이 세 번째 포스터가 바터서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부부는 이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 서점에 걸어두었다. 전시가 아닌 오늘에도 이 포스터의 메시지를 영국인들은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보기 위해 바터를 찾아온다.

 


메리는 이 포스터의 상업적 활용을 한동안 주저하다가 2002년부터 복제한 포스터를 팔기 시작했다. 바터 방문객은 으레 이 포스터를 구입해 간다. 포스터뿐 아니라 다양한 제품이 영국 전역에서 쏟아지고 있다. 이 열풍은 세계로 확산되어, 이베이에서 검색하면 무려 160만 건의 상품이 등록되어 있을 정도다.

 


지난봄 KTX 서울역사에 내가 존경하는 하석 박원규의 대형 서예작품이 걸렸다. 주나라 시대의 금문(金文)으로 책()자를 쓴 것인데, 철길을 연상시킨다. 한국철도공사 최연혜 사장이 작가를 초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안위크의 바터서점을 예로 들면서 우리 철도역들에 책방과 카페를 개설하면 어떨까 했다. “전국의 역들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차만 타고 내리는 그런 기계적인 기능만 할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예술센터가 되게 말이지요.”

 


바터서점을 방문하면서 나는 우리 철도여행의 품격을 높이는 한 대안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터를 찾는 고객이 하루에 1000명 이상 되는데, 책을 구입하지 않는 사람들도 들르거나 만남의 장소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일이다. 책은 사유의 힘을 도모해내는 본원적인 미디어로 사람들을 운집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책은 사람다운 삶을 일으켜세우는 인문정신이다. 책이 있는 곳에 인문정신의 축제가 펼쳐진다.

 


나는 바터서점에서 중세 영국의 고위 성직자이자 애서광이었던 리처드 드 버리의 ‘책의 찬가’를 떠올렸다.

 


“책이여, 너희들은 생명의 나무이니 인간의 정신을 살리고 메마른 지성을 촉촉하게 적셔주는구나.”

 


바터서점에 몰려드는 애서가와 탐서가들은 책으로 이내 친구가 된다. 어디 바터서점에서뿐이겠는가. 책이 있는 곳에서 책과 함께, 우리는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된다.

 

 

 


김언호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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