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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만을 사랑하는 인간 인간들을 사랑하는 ‘그녀’

중앙선데이 2015.10.18 00:30 449호 2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김옥



최근에 읽은 책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의 첫 장 제목은 ‘거부_일상 속에서 베이고 쓸리는 상처’다. 집마다 상비약을 두는 약장이 필요하듯, 이 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는 마음의 상처에 대한 응급처치 방법을 알려준다. 심리치료사인 저자는 왜 수많은 인간의 상처들 중에 왜 ‘거부’를 1장에 놓았을까.


백영옥의 심야극장 -12- 그녀(Her)

부서진 문짝, 박살난 유리창,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분노. 저자는 ‘가장’ 사소한 거부조차도 ‘가장’ 선량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높은 수준의 공격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증언한다. 이별 범죄가 갈수록 악랄해지는 건 거부가 인간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부가 우리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에 이성과 상식이 조금도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험을 위해 조작된 형태로 혼자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조차 그것이 ‘조작된 실험’이었다는 걸 안다고 해도, 이미 당한 고통의 양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에는 데이트 사이트의 슬로건 하나가 등장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이른바 ‘안전한 사랑’에 대한 캐치프레이즈다. 사랑의 ‘달콤함’은 취하되 ‘고통’은 제거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자, 사랑의 위험에 대비한 보험 광고 같은 것 말이다.



 



‘안전한 관계’를 원하는 주인공영화 ‘그녀’(Her·2013)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친구처럼 사귀고, 모든 것이 ‘음성 인식’ 하나로 해결되는 근 미래가 배경이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 편지 닷컴’의 고스트 라이터.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편지’로 사랑을 고백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사랑은 끝장난 지 오래다.



외로운 도시 남자는 어느 날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쇼핑한다. 헤어질 필요도, 차일 필요도, 원치 않으면 언제든 끝낼 수 있는 ‘안전한 관계’를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사만다는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OS지만 스스로 확장되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딥 러닝(Deep Learning)’이 자유자재로 가능해진 미래에 있을 법한 인공지능이다.



인간의 공감 능력을 학습(!)한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그의 편지를 대신 읽고, 그에게 필요한 게 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 보인)다. 친구이고, 애인이며, 비서이자 엄마 같은 존재인 셈이다. 더 놀라운 건 그녀에게 비범한 인간에게만 있는 ‘성장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시스템과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설정 자체는 크게 낯설지 않다. 이미 PC 통신 시대에 많은 남녀들이 육체 없이 ‘텍스트’와 ‘목소리’만으로 서로의 세계에 접속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목소리로만 존재했던 여자를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만나 비로소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 ‘접속’의 선 체험은 이제 ‘육체’가 아예 없는 시스템과 사랑에 빠진 근 미래의 남자에게 조금 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한다.



몸이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육체가 없는 섹스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사만다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여자에 접근한 다음 그녀의 몸을 빌어 테오도르에게 다가가려 한다. 일종의 실험이자 모험이다. 실제 영화 속에서 사만다는 점점 더 현명해지는데, ‘앨런 와츠’ 같은 철학자와 대화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묻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가진 독창적인 로맨스의 한 풍경이 제시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 즉 한 명만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다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점점 더 용량이 늘어나서,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오직 ‘나만의 것’이길 원하고 바라는 인간의 사랑과 달리, 그녀는 8316명의 사람과 동시에 심도 싶은 대화 중이며, 그 중 641명의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소유’와 ‘사랑’을 분별하지 못해 파탄에 치닫는 인간들의 배타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풍경이다.



물론 641명 중 누가 여자이고, 남자인지 알 수 없다. 사실 모두일 가능성이 더 많다. 인간의 오류를 수정해 업그레이드 한 사만다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버린 존재니까 말이다. 그제야 우리는 이 영화의 말미에 사만다가 내뱉는 이 대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인공지능이라 당신보다 빨라요. 그런데 당신이라는 책을 당신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읽다 보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이 생겨버려요. 그리고 거기 빠져서 길을 잃게 돼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라는 책 속에 머물 수가 없어요.”



 



‘거절’은 ‘사랑’을 어떻게 진화시키는가이 영화는 살아 있는 여자와 관계 맺기에 실패한 남자가 결국 시스템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로 읽힐 여지가 있다. 관계 장애 남성들을 위한 판타지 영화로 오독할 가능성 말이다. 사만다 역할을 한 스칼렛 요한슨의 ‘뇌쇄적인 목소리’가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위한 장치가 아니냐는 혐의를 둔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Her’는 내게 앞서 말한 ‘거절’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사랑을 어떻게 진화시키는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읽힌다.



이제 우리는 ‘직접 접촉’(전화 통화)보다 ‘간접 접촉’(메시지)을 통해 대화하는 법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황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상대와 직접 대면해야 하지만(직접 얼굴을 보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메시지는 받는 즉시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다. 최선의 답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결국 네트워크 시대에 인간은 점점 더 상황을 ‘통제’하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택한 건 (인간과 다른 인공지능인) 그녀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인간 사이에선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는 끝없이 변주되고, 변하며, 피어오르고, 시들어가기 때문이다. 성병이나 임신의 위험이 제거된 사이버 섹스를 진짜 섹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까봐 성적으로 완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고교생 뱀파이어들을 다루는 영화와 소설에 열광하는 트렌드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떤 관계 안에서 눈과 눈이, 피부와 피부가, 심장과 심장이 맞부딪혀 나는 감정의 파열음들. 가령 가슴 찢어지는 고통, 벅차오르는 전율, 온몸이 저릿한 사랑 같은 말들은 점점 시간과 함께 사라지게 되는 걸까. 벅차고, 찢어지는 감정의 극단이 사라지고 남는 건 나쁘지 않은 의미에서의 ‘중간 지대’ 정도의 감정이 될까. ‘담담하다’란 말이 이제 새로운 감정 상태를 기준하는 단어가 되는 건 아닐까. 이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진화의 한 과정일까. 영화를 보면서 끝도 없이 밀려오는 사랑의 또 다른 풍경 안에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진화란 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란 의심. 인간의 진화는 지독히도 외로운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깨달음. 영화 ‘AI’에서 남창 로봇 ‘지골로 조’가 했던 “로봇 애인을 경험하면 다시는 인간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거야!”라는 말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한’ 사람과의 사랑이 ‘완벽할’ 수 있을까. 아니, 질문을 바꿔야겠다. 완벽한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랑에서 질투를, 괴로움을, 그리움과 절망, 눈물과 외로움을 빼버린다면 그게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문득 19세기 시인 랭보가 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문구가 떠올랐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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