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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교육 받고도 인격파탄… 스펙 위한 학습의 공허함 웅변

중앙선데이 2015.10.18 00:24 449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최근 우연찮게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베테랑’과 ‘사도’. 두 작품 모두 흥행돌풍을 일으켰고, 청춘스타 유아인이 주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주제의식도 아주 선명하다. 전자는 ‘갑질’에 이골이 난 재벌 3세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베테랑’ 형사 사이의 한 판 승부를 다룬 사회극이고, 후자는 조선시대 최고의 궁중비극인 ‘임오화변’을 다룬 사극이다. 임오화변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적 사건을 이르는데, 지금까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파 간 갈등에 의한 희생양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다. 그와 달리 이번 작품은 역사기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나랏일이 아닌 집안일’로, 다시 말해 부자간의 지독한 애증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워낙 영화를 안 보다 갑자기 두 편을 같이 봐서 그런지 내게는 두 작품이 여러모로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었다. 물론 작품의 미학적 성취와는 전혀 무관한 단상임을 밝혀둔다.


[길 위의 인문학] 영화 ‘베테랑’과 ‘사도’에 대한 단상

 



스펙 위한 학습만 했지 지적 능력은 제로먼저 자식교육에 대하여. ‘베테랑’의 재벌 3세와 사도세자는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물들이다. 둘 다 첩의 자식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뭐 장애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후계자 수업을 완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버지의 기업과 왕국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재벌 3세는 살인에 환각파티로 감옥행에 처해지고, 사도세자는 8일간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귀족으로 태어나 평민, 아니 천민들도 겪기 어려운 지옥행을 자초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정적과의 암투나 전쟁상황이 아닌데도 인생이 그렇게 망가진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가? 더 놀라운 건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소엔 늘 출신과 환경만 좋으면 만사형통일 것처럼 떠들어대면서 이런 케이스에 대해선 침묵해버린다. 워낙 특이하고 구제불능의 캐릭터라서? 그렇다면 이 작품들의 리얼리티와 흥행돌풍은 한낱 오락적 유행에 불과하다는 건데, 그건 아닌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벌 3세건 사도세자건 다 제왕교육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싶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귀한 자식이었을 것이다. ‘베테랑’에선 아버지가 그다지 부각되진 않지만 자식교육에 힘을 쏟는 건 분명해보인다. 주인공이 잘못하면 비서격인 사촌형을 무자비하게 패는 걸로 봐서 말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또 어떤가. 첫아들을 잃고 나이 마흔이 넘어 아들을 얻자 너무 기쁜 나머지 법도를 어겨가면서 곧바로 세자로 책봉하고 두 살 때부터 제왕교육에 들어갔다. 요컨대 둘 다 최고의 스승들 밑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통념대로라면 둘 다 최고의 인재로 키워져야 마땅하다. 유감스럽게도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교육 과열 속 청년의 지적 열정은 고갈재벌 3세는 학벌은 일단 높은 것 같다. 외국의 귀빈들과 유창하게 영어를 주고받는 것으로 봐서는. 하지만 취미는 경호원들과의 격투기 혹은 여배우들과의 애정편력이다. 영화의 결론부분에 가면 ‘베테랑’ 형사와 길거리에서 한 판 승부를 벌일 정도로 싸움에는 도가 텄다. 무슨 뜻인가? 애시당초 공부는 접었다는 사실이다. 스펙을 위한 학습 외에 지적 능력은 제로인 셈이다. 사도세자 역시 마찬가지다. 유년기에는 제법 영민했지만 사춘기부터 엇나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고 싶은 건 일 년에 한두 번이고 주로 활쏘기, 개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자, 여기가 포인트다. 보통 이런 제왕교육을 받으면 당연히 훌륭한 지성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야 간단하다. 공부가 싫고 배움이 즐겁지 않아서다. 나아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다. 이런 경우 학습부담이 커질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공부가 독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 시대 교육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선행학습에 사교육에, 보충수업에 EBS까지. 이 정도면 다들 최고의 엘리트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청년들의 지적 열정은 나날이 고갈되고 있다. 심지어 대학생들 사이에선 책을 읽으면 따돌림을 당한다고 한다. 제왕교육을 받고도 인격파탄에 이르는 두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교육의 대전제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배움이란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다. 다다익선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걷는 한 걸음이 부모의 강요와 외부의 원조로 걷는 천 걸음을 능가하는 법이다.



 



부귀영화도 자신의 몸에 맞게 누려야또 하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아버지가 재벌이거나 왕이라면 과연 그게 행운일까? 아들이 할 수 있는 건 후계자가 되는 것뿐이다. 성공한다 해도 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면서 삶의 충만함을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아버지가 자수성가형일 경우는 더 최악이다. 그런 아버지일수록 자식이 엇나가는 걸 용서하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이룬 건데’ 하는 전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베테랑’의 재벌총수도 그랬을 테지만 영조는 정말로 그런 왕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동생이 왕위에 오른 건 태종과 세조(수양대군), 그리고 영조가 전부다. 앞의 두 경우엔 ‘대살육전’을 치렀지만, 영조는 직접 쿠테타를 지휘하진 않았다. 그래도 신임사화(경종때 벌어진 소론과 노론의 정쟁)로 그 못지 않은 피를 흘렸다.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루머,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출생 콤플렉스 등 각종 장벽을 뚫고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역대 왕들 중에서 제위 기간과 수명이 가장 길다. 이렇게 ‘운이 센’ 아버지의 아들은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운명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와 아들은 상극관계다. 아버지가 기세등등하면 자식이 주눅 들게 마련이고, 자식의 기운이 왕성하면 아버지가 위축되는 법이다. 하여, 이럴 때 자식이 아버지의 뜻대로 자라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거룩한 위업을 저버린 아들. 그럴 때 아들이란 영조의 말마따나 “존재 자체가 역모”다.



 



아무리 대단한 아버지라도 자식 운명 못 구해아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끔찍한 운명도 없다. 부와 권세를 타고났지만 그것을 제대로 계승하려면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베테랑’의 재벌 3세는 이복형제들과 경쟁하면서 또 기업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사도세자가 받은 압박은 말할 나위도 없었으리라.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오직 공부하는 것뿐이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을 이루려면 사대부들보다 더 성리학에 통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타고나길 공부보다는 활쏘기와 사냥이 더 좋은 걸 어떡하란 말인가. 이 운명적 어긋남이 결국 부자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설치고 그걸 빌미로 아버지는 아들을 기어코 죽여버린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절규한다. ‘나는 세자도 싫고 권력도 싫소!’ 부귀영화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몸에 맞게 누려야 좋은 것이지 아버지가 이룬 것을 억지로 누리려면 몸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사도세자가 앓았던 의대증(옷을 입지 못해 계속 찢어버리는 증상)은 운명의 어긋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 이렇게 기대에 부응하지도, 그렇다고 타고난 지위를 버리고 뛰쳐나갈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팔자’를 타고난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다시 말해, 부귀는 타고났지만 그것을 누릴 내적 동력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과 환각이 전부다. ‘베테랑’의 재벌 3세는 폭력중독자다. 여성들을 학대하고 경호원의 발을 부러뜨리고 그러다 마침내 살인까지 저지른다. 사도세자 역시 그랬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나자 밖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주색잡기에 몰두하고 폭력중독에 시달린다. 내시의 목을 따고 욕을 하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요컨대, 지혜가 없는데 과도한 권세를 가질 경우, 선택지는 둘뿐이다. 약자들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거나.



 



배울수록 삶에 대한 무지 증폭되는 현실그렇다면 다시 정리해보자.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면 고귀한 삶이 보장되는가? 학벌이 높으면 인격이 완성되는가? 계층상승을 이루면 인생이 더 자유로운가? 통념적으로는 하나같이 예스일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보여주다시피 현실의 응답은 아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아무리 훌륭한 가문도, 아무리 대단한 아버지도 자식의 운명을 구하진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선 금수저·은수저·흙수저 등의 담론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참으로 비루한 논법이다. 자신이 이루지 않은 부귀를 누리고 왕국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가짜다. 허깨비 인생일 뿐더러 그걸 통해서 고귀하게 사는 건 불가능하다. 고귀한 삶 따위는 필요 없고 그저 부귀와 권세만 누리고 싶다고? 하지만 잊지 마시라.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건 폭력중독과 환각파티가 전부라는 걸.



이렇듯, 우리 시대 역시 제왕교육의 함정에 빠져 있다. 다다익선의 매뉴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앎의 즐거움이나 지혜의 파동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관계를 맺는 법은 고사하고 삶의 기예 같은 건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 결국 인격파탄의 코스를 밟아갈 수밖에 없다. 학벌이 높을수록, 많이 배울수록 삶에 대한 무지가 증폭되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 과연 이 아이러니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까? 아니, 그전에 언제쯤이면 부모들은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또 언제쯤이면 자식들은 부모의 재산이 내 인생의 결정타라고 간주하는 무지에서 탈주할 수 있을까?



 



고미숙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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