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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립, 실력 양성 운동으로 일제에 맞서다

중앙선데이 2015.10.18 00:03 449호 1면 지면보기

경성방직에서 만든 태극성표 광목의 광고 포스터. 경성방직은 당시 국내 공장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중앙포토]



【총평】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14- 3.1운동 이후의 국내 민족 운동

3.1운동 이후 우리나라는 일제에 맞서 경제 자립과 교육, 언론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제 치하에서 대부분의 백성들은 가난했지만, 거부(巨富)를 일군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1930년대 최고 부자는 민영휘였는데, 그의 재산은 대부분 농토였다. 그만큼 일제 강점기 자본의 성장이 미미했다는 뜻이다. 민영휘가 농토 부호라면 김성수 형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부호였다.



3.1운동 이후 회사령 폐지를 계기로 서울에 경성 방직 주식회사가 설립되고, 평양에 메리야스 공장 등 민족 기업들이 설립되었다. 경성 방직 주식회사는 1919년 김성수가 설립한 우리나라 섬유업계 최초의 주식회사이다. 김성수는 경성방적 같은 기업체 외에 학교, 언론사 경영도 겸하였다. 이러한 기업의 설립으로 인하여 미약하게나마 한국인 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세운 기업은 대부분은 영세한 소규모 공장이었다.



일제는 한국과 일본 간의 무역에서 면직물과 주류를 제외한 모든 상품의 관세를 폐지하려 했다. 1923년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관세가 폐지되자 일본의 자본과 상품이 밀려 들어왔다. 이에 실력 양성 운동의 하나로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조만식, 이상재 등 민족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어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1923년 경성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면서 ‘내 살림은 내 것으로’라는 구호 아래 물산 장려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자작회, 부인들의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의 단체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초기에는 민중의 호응 속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민족 자본이 취약하여 늘어난 수요를 만족시킬 정도의 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상품 가격만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산 장려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다양한 민족 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민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도 전개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진흥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교육 진흥을 위한 대중 계몽 운동을 전개했고, 이에 따라 교육열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수용할 학교가 크게 부족했다.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고등 교육이 가능해졌지만, 실제로는 초등 교육과 실업 교육에 한정되었으며, 고등 보통학교는 증설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0년 6월 한규설과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과 인재 양성을 목표로 조선 교육 협회를 결성했다. 조선 교육 협회는 고등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조선 총독부에 대학 설립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 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1923년 당시 조선에는 관립 전문학교 5개와 사립 전문학교 3개가 있었을 뿐, 대학이 없었다. 조선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이에 우리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1923년 이상재, 한용운, 이승훈 등은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창립했다. 기성회는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해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 1원씩’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1,000만 원 모급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는데, 만주, 미국, 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모금 운동이 잇따랐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억압, 연이은 가뭄과 홍수 등으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져 모금이 지지부진해지자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중단되었다.



한편, 일제는 한국인들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망을 무마하고, 한국 거주 일본인의 고등 교육 수요 충족시키기 위해 경성 제국 대학을 서둘러 설립했다. 경성 제국 대학은 사실상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1934년까지 언론 기관을 중심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농촌 계몽 운동이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신간회가 해체되면서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민족 문화 운동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조선일보는 문맹 퇴치를 위해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와 함께 한글 교재를 보급하고 순회강연을 개최하면서 문자 보급 운동을 펼쳤다.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다. 브나로드 운동이 학생을 중심으로 확대되자 조선 총독부는 이를 민족 운동으로 규정하여 강제로 중단시켰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을 지닌 브나로드 운동을 배경으로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 과 같은 계몽 소설도 등장했다.



조선 총독부 학무국은 1910년대부터 조선어 외 모든 과목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편찬했고,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조선어 외 모든 교과목의 교수 용어를 일본어로 할 것을 명시했다. 이에 민족의식을 지키고 항일 독립 의지를 고취하려는 노력이 국어 연구 분야에서도 이어졌다. 대한제국 시기 국문 연구소에서 일하던 주시경과 지석영은 우리말을 체계화하고자 노력했다. 그 뒤를 이어 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선어 연구회 만들어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섰다(1921).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을 보급하고,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했으며, 기관지인 “한글”을 간행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회원들은 한글 보급을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면서 한글 강습회를 개최했다. 조선어 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표준어를 제정했다. 이를 기초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의 편찬 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거의 완성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1957년 한글학회에 의해 우리말큰사전 완성). 1942년 일제가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회원들을 대거 검거하고 투옥했다. 회원들에게는 치안 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했고 가혹한 고문으로 이윤재, 한징은 옥사했으며, 조선어 학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조선어 학회 사건).





【핵심 키워드】



☞ 3.1운동 이후 [경성 방직 주식회사]와 [평양 메리야스 공장] 등 [민족 기업]들이 설립되었다. 1920년 [회사령 폐지]와 [관세 폐지]에 의해 일본의 자본과 상품이 밀려 들어왔다. 이에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 조선인 본위의 교육과 인재 양성을 목표로 [조선 교육 협회]가 결성되었으며,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고 1,000만 원 모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망을 무마하고, 한국 거주 일본인의 고등 교육 수요 충족시키기 위해 [경성 제국 대학]을 서둘러 설립했다. 조선일보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와 함께 [문자 보급 운동]을 펼쳤다.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을 보급하고,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했으며, 기관지인 “한글”을 간행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어 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표준어]를 제정했다. 이를 기초로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거의 완성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2년 조선어 학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조선어 학회 사건]). ☜



 



【예상 문제】



1.?다음을 내세운 민족 운동이 일어난 배경으로 적절한 것은?

[제1기 실행 조건]

의복은 우선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정월 1일부터 조선이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착용할 것.음식물은 소금, 설탕, 과자, 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물산을 사용할 것.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이 가능할 경우 이를 사용할 것.

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 폐지 움직임이 있었다.



② 전시 동원 체제에 따라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③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규정한 회사령이 공포되었다.



④ 특정 물품에 대한 시전 상인의 독점 판매권이 폐지되었다.



⑤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남면북양 정책이 추진되었다.

* 2014년 3월 학력평가 16번



 



2.?다음 학생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정우회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② 사립 학교령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③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④ 일제는 경성 제국 대학 설립으로 대응하였다.



⑤ 언론사들에 의해 농촌 계몽의 일환으로 홍보되었다.

* 2013학년도 수능 13번

?



3. (가), (나)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우리가 일용에 무익한 연초를 3개월 기한으로 끊고, 그 소모 비용을 각자가 모아 전국 인구 중 담배를 피우지 않는 부녀자를 제외하여 1천 2백만으로 산정하고, 한 사람 1원이면 1천 2백만 원이니 국채를 갚음이 어찌 걱정이랴.



(나) 우리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고,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를 목적하노라.



① (가) -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② (가) -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③ (나) -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④ (나) - 일본의 관세 철폐 움직임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⑤ (가), (나) -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였다.

* 2012학년도 6월 모의평가 11번



 



4. (가) 상황에서 (나) 주장에 입각해 추진한 활동으로 옳은 것은?



(나)

조선인이 신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피룡한 것은 각 방면의 전문 지식이다. 전문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이다.



① 언론사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②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 실업 학교를 증설하였다.



③ 서북 학회를 통해 새로운 교육 보급에 노력하였다.



④ 대학 설립을 위해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⑤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 2009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5.?(가), (나) 자료와 관련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비록 우리 재화가 남의 재화보다 품질상 또는 가격상으로 개인 경제상 다소 불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민족 경제의 이익에 유의하여 이를 애호하며 장려하여 수요하며 구매하지 아니치 못할지라.



(나) 민중의 보편적 지식은 보통 교육으로 능히 수여할 수 있으나 심원한 지식과 심오한 학자라는 고등 교육에 기대하지 아니하며 불가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① (가) -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② (가) - 일본 상품의 무관세 움직임에 대응하여 시작되었다.



③ (나) -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나) - 브나로드 운동과 병행하여 전개되었다.



⑤ (가), (나) -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2007학년도 수능 17번



 



6.?다음 글의 취지에 가장 가까운 구호는?



문명과 행복은 배우는 자가 얻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옛날에는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우리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늘날 저렇듯 우리와 차이가 나는 것은 지식을 널리 세계에 구하여 힘써 배운 까닭이다. 50년 동안 부지런히 배운 것이 현재 일본 사람이 누리는 바로 그 문명과 행복이다.

-『서울잡감(雜感)』



① 만주는 조선으로!



② 토지는 농민에게로!



③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④ 군사 원호(援護), 노력 봉사!



⑤ 차금(借金) 예방, 춘궁(春窮) 퇴치!

* 2005학년도 수능 16번



 



7.?다음 판결이 내려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피고인 이극로, 최현배 등의 치안 유지법 위반 사건에 대한 예심을 마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함.



이 단체는 겉으로는 문화 운동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실력 배양 단체로서, 피고인들은 검거되기까지 10여 년 동안이나 조선의 어문 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①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식량을 공출하였다.



② 조선인을 억압하기 위해 태형을 실시하였다.



③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공포하였다.



④ 학교 설립을 억제하기 위해 사립 학교령을 발표하였다.



⑤ 일본 기억의 진출을 촉진하기 위해 회사령을 폐지하였다.

* 2014학년도 수능예비시험 4번



 



8.?(가)~(마)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가) - 간경도감에서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다.



② (나) - 신경준이 훈민정음운해를 짓다.



③ (다) - 서재필이 한글 신문인 독립 신문을 창간하다.



④ (라) - 조선어 연구회에서 ‘가갸날’을 제정하다.



⑤ (마) - 조선어 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다.

* 2013학년도 수능 20번



 



9. ?(가), (나)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민중의 보편적 지식은 보통 교육으로 능히 수행할 수 있으나, 심오한 지식과 학리라는 고등 교육에 기대하지 아니하면 불가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나) 조선인에 있어서 무엇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하고 긴급한 것을 들자면 지식 보급일 것이다. … (중략) … 간단하고 쉬운 문자의 보급은 민족이 가질 최대의 긴급사라 하겠다.



① (가)는 이른바 문화 통치 시기에 추진되었다.



② (가)는 일제의 방해와 모금 운동의 부진으로 좌절되었다.



③ (나)는 계몽과 문맹 퇴치를 지향하였다.



④ (나)는 언론 기관의 선전과 지원으로 확산되었다.



⑤ (가)는 (나)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추진되었다.

* 2011학년도 수능 10번



 



10. ??다음은 어느 소설의 가상 광고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기의 모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개봉 영화 ‘아리랑’을 관람하는 여성



② 새로 나온 신소설 ‘혈의 누’를 읽는 학생



③ 국채보상운동 모금에 적극 참여하는 청년



④ 한글 사전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조선어학회 회원



⑤ 징용과 징병을 독려하는 작품을 전시중인 미술가

*2009학년도 9월 모의평가 14번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①

‘조선인 산품을 착용할 것’, ‘조선 물건을 사용할 것’,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이 가능한 경우 이를 사용할 것’ 등을 통해 평양에서 조만식 등에 의해 추진된 물산 장려 운동임을 알 수 있다.

해설 : 정답 ④

제시된 자료에 성금을 모아 대학을 설립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④ 일제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민족 자본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노력을 좌절시켰다.

해설?: 정답 ②

(가)는 1907년에 일어난 국채 보상 운동이다. (나)는 1920년대 초 물산 장려 운동이다. 두 운동 모두 일제의 경제 침략에 맞서 경제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이다.



② (가) 국채 보상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해설 : 정답 ④

④ 1920년대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한 신교육 운동의 이로한으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교육회를 중심으로 기성회가 결성되고 전국적 모금 운동을 통해 민립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이 운동은 초기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1923년과 1924년 남부 지방의 가뭄과 전국적 수해로 모금 운동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해설 : 정답 ④

(가)는 물산 장려 운동, (나)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해당한다.



④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민족의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위한 운동으로 1922년부터 시작되어 1920년대 중반경에 끝났다.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 동아일보 주도로 시작되어 1934년 일제의 탄압이 있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해설 : 정답 ③

제시문은 교육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열악한 한국인의 교육 환경이 계속되자,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생활 개선, 문자 보급 등의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③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는 대표적인 문맹 퇴치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 구호이다.

해설 : 정답 ①

제시된 자료 내용은 1942년에 일어난 조선어 학회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일제 경찰은 조선어 학회가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통해 민족 정신을 높이고 더 나아가 독립을 쟁취하려 하는 독립운동단체로 보고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였다.



①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는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던 1940년대이다. 일제는 이 시기에 총동원령을 내려 인적, 물적 수탈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식량 공출이었다.

해설 : 정답 ④

제시된 자료는 한글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찾는 문제이다.



④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된 것은 1921년으로 (라) 시기가 아닌, (마) 시기이다. 조선어 연구회는 가갸날을 제정하고 “한글” 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해설 : 정답 ⑤

(가)는 1922년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관련된 자료이다. (나)는 문맹 퇴치 운동과 관련된 자료이다.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당시 재해로 인한 모금 운동의 부진으로 결국 실패했다.



⑤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시기적으로 문맹 퇴치 운동보다 이전의 일이다.

해설 : 정답 ④

심훈의 상록수는 1930년대 농촌 계몽 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 나온 작품이다.



④ 조선어 학회는 1931년 조선어 연구회를 계승하여 결성되었다. 조선어 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편찬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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