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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영화 ‘사도(思悼)’와 수원 화성

중앙일보 2015.10.16 09:43
얼마 전에 영화 ‘사도(思悼)’를 보았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우수한 연출과 연기로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했다.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드라마틱한 부분은 태조에서 세종 그리고 영조에서 정조까지의 3대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나 연출력과 연기력이 갖추어지면 조선 실록의 어느 왕조의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꾸며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사도’는 1762년의 음력 5월13일부터 21일까지 8일간의 이야기(壬午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간의 갈등을 넘어 왕과 후계 왕(세자)과의 갈등까지 섬세하게 잘 보여 주었다. 특히 영화 속의 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영조가 자신의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세자가 보기 싫어 ‘너의 존재 자체가 역모’,라든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허공에 날라 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느냐’ 라는 세자의 절규는 오늘 날 젊은이에게는 ‘일등만 좋아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영화‘사도’가 오스카 외국영화상 부문에 출품하였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백가쟁명:유주열]영화 ‘사도(思悼)’와 수원 화성

‘사도’를 보면서 수원의 화성과 융건릉이 생각났다. 나중에 정조가 된 세손은 효심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장하여 현륭원(나중에 왕으로 추존되어 융릉이 됨)을 조성하고 인근에 자신의 능인 건릉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었지만 노론(벽파)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고종 조에 와서 장조로 추존되고 현륭원이 융릉으로 격상된다.
정조의 직계 후손은 순조와 헌종으로 끝나지만 철종과 고종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낳은 서자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후손이다. 철종은 은언군의 손자이고 고종은 은신군의 양자 남연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 이선(李?)은 왕이 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후 조선조는 그의 자손에 의해 통치된 셈이다. 고종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한 것도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보인다.
한 때 TV 인기 드라마 '이산(李? 정조)‘이 일본 NHK에서도 방영되어 일본 사람을 만나면 ’이산‘이 화제가 되곤 하였다. 드라마 ’이산‘을 통해 정조는 세종대왕과 비견될만한 군주로 꼽혔다.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主) 라는 세론이 높아 처음 상당기간은 왕권 확립에 치중해야 했다.
먼저 비명에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준비했다. 양주 배봉산의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킨 후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천봉(遷峰 이장)을 한다. 수원 팔달산을 중심으로 신도시 화성(華城)을 만들어 화산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풍수 전문가들은 조선조에 정통성이 낮은 왕들이 천봉을 통하여 지위를 높이는 이른바 ‘사친추숭(私親追崇)’의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해 왔다고 한다. 정조도 왕권확립을 위해 천봉과 함께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진 인재를 등용하고, 장용영(壯勇營 국왕 경호대)을 통해 독자적 정치기반을 조성 기득권세력을 견제하였다.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여 기득권세력을 서울에 남겨 두고 신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도시에서 개혁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 정조의 꿈이었는지 모른다.
중국에서 지인이 찾아오면 지하철 1호선을 같이 타고 수원으로 곧 잘 내려간다. 꿈을 이루지 못한 정조의 미완의 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팔달산을 끼고 버드 내(柳川)의 버들잎처럼 타원형처럼 늘어진 화성은 전형적인 성곽도시(城市)이다. 화성의 동서남북 성문은 걸출하다. 북쪽을 바라보는 장안문(長安門), 남쪽의 팔달문(八達門)은 서울의 4대문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한반도 성곽도시의 대표는 서울이라고 하지만 도시의 발전에 가려져 체감하기가 힘들다.
나는 화성을 ‘리틀 한양’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지인은 ‘리틀 베이징’으로 부르고 싶다고 한다. 화성 성벽에 전돌(塼)이 사용되었고 서울의 남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옹성(甕城 군사적 보호를 위해 중요한 성문 밖을 반월로 둘러쌓은 이중 성벽)을 지적하면서 중국 베이징의 성문이 생각이 난다고 한다.
사실 화성 축조 기록을 보면 당시 과학 기술을 총 동원하여 중국의 축성기술을 원용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점토를 기와처럼 고온에 구워 만든 전돌로 성벽을 쌓았다. 건축 현장에는 연경(燕京 베이징)사절로 중국을 다녀 온 실학파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중국의 분위기가 없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수원 화성을 둘러 본 후 융건릉을 찾았다. 정조는 영우원 천봉을 위해 서울 인근의 풍수 길지를 물색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수원부에 화산이라는 곳이 풍수 길지로 소문이 났지만 이미 수원부 관아가 들어 선 읍성(邑城 또는 邑治)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 같으면 기존의 도시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 천봉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백성을 이주시킬 대체도시(신도시)를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다. 효종이 승하하면서 화산에 능을 조성할 것을 생각했다지만 감히 나서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숭문호학(崇文好學)의 정조는 독서를 통해 수원 팔달산 아래 새로운 도시가 될 입지를 갖춘 곳이 있음을 알았다. 100년 전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미 지적해 두었기 때문이다. 신도시 건설의 후보지는 결정된 셈이다. 정조는 신도시의 이름으로 화성으로 명명하고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초대 유수로는 영의정을 지낸 자신의 최 측근 채제공(蔡濟恭 남인의 영수)을 임명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화성을 중시하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 주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여 화산의 백성을 이주시키고 화산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시면서 화산과 화성은 부모와 함께 자신의 뼈를 묻는 송추지향(松楸之鄕)이라고 하였다. 화성행궁의 정문에 ‘신풍루(新豊樓)’라는 편액을 단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다. 한고조(漢高祖)의 고향 풍패지향(豊沛之鄕)을 비유하여 정조는 자신의 새로운 풍패(고향)를 얻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1795년 정조는 대대적인 을묘원행(乙卯園行 왕릉이 아닌 현륭원에 참배)을 통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른다. 당시 기록을 보면 첫째 날 아침 일찍 창덕궁을 출발하여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시흥행궁에서 일박하고,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 화성행궁(봉수당)에 도착하며, 셋째 날에는 화성 향교 대승전 참배와 문무별과를 시행하여 지방 인재를 선발하였다.
넷째 날에는 아버지를 찾아 현륭원 참배하고, 다섯째 날에는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거행하며, 여섯째 날에는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일곱째 날에는 귀경 길에 올라 시흥행궁에서 다시 일박을 하고, 여덟째 날에는 시흥에서 경로행사를 끝내고 저녁에 창덕궁에 도착하였다. 7박8일간의 긴 일정이다.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화성원행반차도’를 보면 행차를 직접 보는듯한 박진감을 느끼게 된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 왕권을 과시하고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려는 개혁군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정조가 꿈꾸는 나라가 금방 이루어 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행사이다.
화성행궁과 융건릉을 둘러 본 지인은 정조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중국 청나라의 건륭제의 효성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와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에서는 건륭제가 있었다. 건륭제의 어머니는 아버지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전 친왕시절 입궁한 인물로 신분이 비교적 낮았다. 옹정제가 일찍 죽고 제위에 오른 건륭제는 생모를 황태후로 모시고 효성을 다하였다. 건륭제의 강남순행은 여행을 좋아하는 어머니에 대한 효도여행이었다고 한다.
정조가 현륭원 조성과 화성행궁 건설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넘어 화성을 정치 경제 군사 중심의 부도(副都)로 만들어 자신의 개혁정치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다분히 정치성을 띤 프로젝트였다.
조선조에는 정도전의 건국이념에 따라 유교적 이상과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재상(宰相)이 중심이 되어 다스려지는 신권(臣權)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왕이 왕권을 통해 국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려는 것을 억제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움 속에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세력(서인)은 신권정치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왕권을 억제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왕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를 죽게 하여 효종을 즉위시키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된 숙종조에는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이 요절하자, 출신 배경의 약점이 있는 영인군을 왕(영조)으로 옹립하여 정국을 좌지우지하였다. 정조는 개혁 군주로서의 싹을 보인 아버지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기득권세력(노론)의 농간으로 이해하였다.
정조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정조가 49세(1800년)에 죽음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려는 아버지와 자신의 꿈이 끝났다. 조선조 마지막 개혁 군주의 꿈이 안개처럼 사라진 것이다. 정조의 예상치 않은 죽음으로 기득권세력은 세도정치로 변형되면서 결국 조선 왕조가 패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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