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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목요일] 술술 순한 소주의 유혹, 폭음하는 2030 여성들

중앙일보 2015.10.15 01:31 종합 2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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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밤 서울 종로구의 한 주점. 손님이 찬 테이블 65곳 중 47곳에 과일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여성들이 앉은 자리였다. 친구 세 명과 이곳에 온 여대생 이지연(23·서울 동대문구)씨는 “과일 소주는 알코올 도수도 낮고 달달한 과일 맛이 나서 술 같지 않다. 술을 잘하는 편이 아닌데도 두세 병은 거뜬히 마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이씨와 일행은 과일 소주를 1병씩 마셨다. 주점 직원 김모(27)씨는 “과일 소주가 나온 뒤로 젊은 여성 손님이 확 늘어 요즘은 남성보다 여성 손님이 더 많다”고 말했다.

저도수 소주 열풍의 그림자

지난 3월 롯데주류가 처음 선보인 과일 소주(처음처럼 순하리)는 올해 주류업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됐다. ‘순하리’가 인기리에 팔리자 하이트진로(자몽에 이슬)·무학소주(좋은데이 과일시리즈) 등 후발 주자들도 앞다퉈 다양한 과일 소주를 내놨고, 18종의 제품이 시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과일 소주는 주정(에틸 알코올)에 과일향과 액상과당 등을 섞은 혼합주(리큐어)다. 알코올 도수가 13~14%대로 기존 소주보다 5~8%포인트가량 낮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과일 소주가 전체 소주 매출의 20%를 차지한다. 소주를 꺼리는 계층인 젊은 여성에게 ‘소주 같지 않은 순한 술’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마케팅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낮은 도수 주류 열풍이 여성의 폭음을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소비자연맹이 지난 7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270명 중 23%(62명)는 저도수 소주(알코올 16% 이하) 등장 이후 음주량이 ‘약간 늘었다’, 14.4%(39명)는 ‘많이 늘었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의 42%가 ‘저도수 소주를 마신 뒤 음주량이 늘었다’고 답해 남성(34%)보다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저도수 주류의 유행은 2000년대 초 와인의 대중화로 시작됐다. 2006년 알코올 16%대의 소주가 등장해 돌풍을 일으켰고, 최근엔 보드카와 위스키 업체들도 알코올 함량을 확 줄인 술을 내놓고 있다. 방형애(고려대 보건행정학과 교수) 한국보건협회 기획실장은 “저도수 주류는 순한 맛을 내세워 그동안 음주 자체를 하지 않았던 여성들이 새로 술을 시작하도록 유인하는 측면도 있다. 저도수 주류 중에서도 과일 소주는 달콤한 맛과 과일 향으로 소주의 독한 맛을 감춰 술을 더 많이 마시게 한다”고 지적했다. 방 실장은 “과일 소주는 결코 순하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한 여성의 하루 알코올 섭취 제한량은 20g인데 과일 소주 1잔(알코올 도수 14도짜리)에 든 알코올의 양은 약 5.6g이니 3.5잔만 마셔도 위험한 음주의 범위에 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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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성모병원 이해국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5년간 젊은 여성층의 음주율과 고위험 음주율이 급증하고 있다. 주류업체들이 소주·위스키·보드카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낮춘 제품을 내놓고 여성을 타깃 삼아 ‘순한 술’로 마케팅을 해온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회적인 요인으론 여성의 사회 진출은 늘고, 이들이 주로 서비스업 등 감정 노동을 하는 업종에 몸담게 되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해외 선진국에 비해 우리 사회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건전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니 싸고 쉬운 대안인 술에 의존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건국대병원 서정석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요즘 젊은 여성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육아를 하고, 수명이 길어진 부모 세대 봉양까지 하는 3중고(苦)에 시달린다. 이러한 여성들이 육체적·정신적인 피로감을 풀기 위해 술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지난해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20대 여성의 월간 폭음률(월 1회 이상 한 술자리에서 5잔 이상 음주하는 비율)은 2005년 30.7%에서 2014년엔 39%로 껑충 뛰었다. 30대 여성은 같은 기간 17.9%에서 24.2%로 늘었다. 같은 연령대 남성의 폭음률은 오히려 줄었다.

여성의 음주가 남성의 음주보다 건강에 더 치명적이다. 하종은 카프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은 “여성의 알코올 분해효소는 남성의 절반 수준이고, 체내 수분 비중도 낮아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분해하는 속도나 능력이 떨어진다. 술에 의한 식도·위·대장·간 등의 장기 손상 정도가 심하고 알코올 사용장애(중독)로 진행되는 속도도 남성보다 훨씬 빠르다”고 설명했다. 이해국 교수는 “처음엔 순한 술로 한두 잔 홀짝홀짝 마시는 수준으로 시작했어도 알코올 사용장애로 진행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정석 교수는 “자신의 음주 습관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스더 기자, 김정희 인턴기자(고려대 사학과 4년)
etoile@joongang.co.kr

알코올 사용장애 = 과도한 양의 알코올을 섭취해 의존증이나 내성이 생긴 상태. 술을 마실 때마다 의도한 것보다 많은 양을 마시거나 가정·직장에서 제 역할을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이들이 해당된다. 식사 때 반주를 곁들이거나 잠들기 위해 술을 마시는 등의 습관도 사용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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