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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김일성 광장 열병식의 정치학과 경제학

중앙일보 2015.10.15 00:31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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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논설위원

지난 10일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25분짜리 연설 직후부터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선 북한을 분석하는 일을 하는 한 탈북자를 만났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인민’이란 단어가 97차례나 들어간 연설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살 때는 이와 비슷한 표현조차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북녘의 가족과 수시로 통화해 현지 사정에 비교적 밝다는 이 탈북자는 “선전·선동의 일부”라고 판단했다. 맥락을 따져보자. 지난 8월 북한이 목함지뢰와 포격 도발에 이어 준전시상태를 선언했을 당시 당국은 주민들을 땅굴로 피신시켰다. 그 뒤 8·25 합의가 이뤄지자 “괴뢰도당을 압박해 총 한 발 쏘지 않고 대북 확성기를 철거시키고 전쟁도 막았다”고 선전한다고 한다. 당시 공포에 떨었던 주민들은 이번 당 창건 행사 때 큰 선물을 기대했는데 줄 게 없자 립서비스라도 선사했다는 것이다. 인민에게 뭔가 통 큰 선물을 해야 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북 정보 전문가를 만났더니 열병식 당시 에어쇼를 눈여겨보라고 했다. 당 창건 70주년을 상징하는 70이라는 숫자와 낫과 망치, 붓으로 이뤄진 당 깃발을 공중에서 재현한 항공기는 프로펠러기인 AN-2기였다. 68년 전인 1947년 소련에서 개발돼 조선노동당과 나이가 비슷한 ‘할아버지’ 기종이다. 게릴라전을 펼칠 경보병을 대당 8~12명 싣고 기습남침을 하려고 운용 중이라고 한다. 또 다른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8·25 합의 직후부터 AN-2 등을 이용해 열병식 에어쇼를 연습했지만 제트기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선 군이 보급의 최우선이지만 제트전투기가 충분한 훈련을 할 항공 연료는 물론 지상 레이더를 가동할 전력조차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도 김정은이 그토록 ‘인민’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일 것이다.

 북한을 연구하는 한 중국 학자는 열병식의 정치학과 경제학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2만 명 이상을 동원한 열병식은 김정은이 정치적으로 당·내각·군을 장악하고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반면 ‘인민’ 발언은 김정은이 당면한 과제를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김정은은 권력 유지를 위해 대내적으로는 경제발전으로 정권 안정을 이뤄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군사력을 확보해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김정은이 핵·경제 병진노선을 외치는 명분이다. 김정은이 열병식 연설에서 ‘핵’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핵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핵으로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북한에 투자할 나라가 거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게다가 북핵은 쉽게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국 외교가에서는 북핵 해결과 관련해 “미국은 정력이 없고, 중국은 동기가 없으며, 한국은 능력이 없고, 북한은 신뢰가 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흔히 북핵이 북한 문제의 전부라고 오해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은 권력 유지를 위해 핵만큼 경제발전에도 신경 쓸 수밖에 없는데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엔 북핵이 북한 문제 그 자체일 수 있지만 한국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 그리고 통일을 향한 파트너일 수밖에 없는 북한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상황이 좋아진 연후에 핵 문제를 본격적으로 의논하는 게 순서라는 지적이다.

 핵만큼 경제가 급한 김정일이 손을 벌릴 곳은 현실적으로 중국 외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개성공단 확장, 제2 개성공단 건설, 철도 등 인프라 투자와 같이 남북에 윈윈이 될 기회가 적지 않다. 마침 방미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열병식에서 확인한 정치학과 경제학을 바탕으로 북한이 변화할 에너지를 만들 전략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숙의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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