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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이런 이산가족 상봉을 계속 봐야 하는가

중앙일보 2015.10.15 00:26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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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
디지털 에디터

5일 뒤면 남북 이산가족이 금강산에서 만난다. 상봉 예정자들의 환한 얼굴이 언론에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들릴 때마다 기대보다 걱정이, 기쁨보다 우울함이 앞선다. 첫 상봉 취재의 트라우마 탓이다.

 남북 정상회담의 결실로 2000년 8월 15일 남과 북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취재의 시작은 즐거웠다. 기자들은 남측 가족 숙소인 서울 올림픽파크텔에 들어가 밤 늦도록 방문을 두드리며 취재를 시도했다. 평소 이런 행동은 욕설 세례를 받기 십상이지만 재회의 기쁨에 들뜬 가족들은 기꺼이 기자들을 방으로 들여 가족사를 들려줬다.

 만남의 시간이 왔다. 나는 상봉장(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들어가 북에서 오는 장남을 50년 만에 만나게 되는 87세(이하 당시 나이) 노모 옆을 지켰다. 멀리서 65세 아들이 걸어왔다. 15세 때 헤어졌던 아들은 “엄마”라며 품에 안겼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고 큰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어색했다. 격정이 잘 안 느껴졌다. 북에서 온 가족이 수시로 “(김정일)장군님 덕분…”을 반복했기 때문일까. 50년 세월이 감정마저 앗아간 걸까. 갖은 생각이 들었다.

 3박4일이 흘러 북측 가족이 떠날 시간이 왔다. 며칠 사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쏟으며 펄쩍펄쩍 뛰었고, 버스를 따라가며 통곡하는 이도 있었다. 버스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북측 가족도 어깨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은 지켜보기 힘들었다. 북한 수학자인 조주경(68·전 김일성대 교수)씨와 모친 신재순(88)씨도 그랬다. 신씨는 모진 고생을 하며 서울대생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6·25가 터지고 아들은 의용군으로 전선에 투입됐다가 총상을 입고 치료차 북으로 갔다. 북한에서 큰 수학자가 됐다. 신씨는 사찰에서 아들을 위해 불공을 드려 왔다. 그 아들이 꿈같이 나타났다.

 “어머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라며 하직의 절을 올리는 아들의 손을 잡고 “아들아 여기서 살자”며 어머니는 매달렸다. 결국 어머니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했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 이제 가면 언제나 볼까.” 4년 뒤 어머니와 아들은 남과 북에서 나란히 숨졌다. 북한 잡지는 조씨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6·25 당시부터 어머니를 그리며 쓴 일기를 소개했다. 조씨는 상봉 이후 일기에 “아 어머니, 함께 살자고 떨어질 줄 모르던 어머니”라고 적었다. 이보다 잔인한 일은 세상에 없다.

 달라져야 한다. 훨씬 많이 만나야 하고 한 번 찾은 혈육은 한 쪽이 죽는 날까지 안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서독이 동독에 물자를 지원하고 인도주의적 조치를 이끌어낸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 사들이기)든,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본지 인터뷰에서 설명한 통행증협정(Passierschein)이든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 수만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

강주안 디지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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