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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가지마세요, 어서오세요 … 491조 계좌 전쟁

중앙일보 2015.10.15 00:01 경제 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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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이동제가 첫발을 뗀 지 100일이 지났다. 7월 1일부터 시작된 1단계 계좌이동제는 자동납부에 대한 조회·해지만 가능한 걸음마 단계다. 금융권에 따르면 하루 평균 2000건의 조회가 발생, 이 중 50~60% 정도가 자동납부를 해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달 말부터 시행되는 2단계 계좌이동제가 시행되면 은행권에 지각 변동을 몰고올 전망이다. 보험·통신·카드 등의 대부분의 자동납부를 간단히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계좌이동제에 사활 건 금융권
자동납부 조회·해지 시행 100여 일
이달 말 ‘변경’ 가능한 2단계 돌입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제 주거래 은행을 변경했거나 변경하고 싶었지만 못했다는 응답이 51.2%였다. 변경 못한 이유로는 ‘영업점을 방문할 시간이 없고 바빠서(58.1%)’와 ‘자동이체항목을 직접 변경해야 해서(33.5%)’를 꼽았다. 하지만 다음달부터는 온라인에서 클릭 몇 번으로 주거래 은행을 바꿀 수 있다. 그동안 자동이체를 볼모로 천편일률적인 금융 서비스를 선보였던 은행이 ‘집토끼’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당근’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은행간 총성 없는 ‘통장 대첩’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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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개인이 주로 사용하는 지로 자동이체(89조 7000억원)와 CMS 출금이체(87조 9000억원) 금액은 177조 6000억원에 달했다. 이 시장만 놓고 싸우는 게 아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수시입출식 통장의 잔액은 9월 말 기준 491조 3000억원에 이른다. 수시입출식 통장은 주로 월급 통장으로 사용되면서 각종 자동납부 금액이 빠져나가는 통장으로, 은행 입장에선 큰 이자를 들이지 않고 각종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효자 상품’이다. 게다가 대부분 이 통장이 있는 곳을 주거래 은행으로 하여 예적금, 보험, 대출 상품에 가입한다. 여기에 내년에 도입되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감안하면 주거래 고객 확보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특히 금융지주의 경우, 은행이 확보해둔 ‘집토끼’를 놓치면 다른 계열사로도 도미노 효과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 금융그룹 관계자는 “이제는 은행·카드·증권 등 개별적으로 고객을 공략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계좌이동제를 고리로 해서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 이들을 다른 계열사의 고객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천편일률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던 금융 회사가 자기 색깔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비스별 차이가 없어 은행별로 불분명했던 색채를 계좌이동제를 계기로 확고히 살리겠다는 취지다.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13일 ‘하나 멤버스’를 출시하면서 “국민과 신한지주도 나름의 강점이 있지만 하나금융지주는 핀테크 쪽으로 앞서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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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지주의 이런 고민은 계열사간의 복합 상품 개발에서 드러난다. 하나금융의 ‘하나멤버스’가 대표적이다. 하나금융 내 6개 계열사의 금융 거래 실적을 포인트로 통합해 적립하고, 적립된 포인트는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서비스다. 이 포인트를 자동인출기에서 현금으로 바로 뽑아 쓸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적금이나 카드대금·보험료·공과금 등의 금융 거래에 사용 가능하다. KB금융도 카드·적금·대출 등 6개의 상품으로 ‘KB국민 원 라이프 컬렉션’을 구성했다. ‘KB국민원통장’은 공과금 또는 KB카드 결제를 1원만 해도 수수료 3개 항목을 무제한으로 면제해 준다. 여기에 급여·가맹점 대금·연금 수령 중 하나를 추가할 경우 6개 항목의 수수료가 면제된다. 신한은행은 최근 입출금 거래 실적과 계열사 거래에 따라 3년제 최고 연 2.8%의 금리를 제공하는 ‘신한주거래우대적금’을 출시했다. 이와 함께 주거래 우대 패키지 3종 세트(주거래온가족서비스·주거래생활비대출·주거래카드)를 곧 출시한다.

 소비자 입장에선 선택권이 넓어졌다. 이색 서비스와 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은행의 ‘우리웰리치주거래통신·관리비통장대출’상품은 통신비나 관리비 등을 납부할 잔액이 부족하면 자동으로 마이너스 통장으로 전환되는 ‘트랜스포머’ 기능을 갖췄다. 농협은행의 ‘NH주거래우대 대출’은 주거래 실적이 있으면 별도의 제출서류 없이 300만원까지 대출해 준다. 구자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고객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 제공과 이동한 고객에 대한 사후 관리 등 은행이 개인 고객과 고객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과다한 상품·서비스 제공으로 인한 출혈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다른 상품과의 크로스 셀링(교차 판매)를 통해 수익을 높이려는 전략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이어 “상품과 서비스 제공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고객을 세분화하고 대상별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선보이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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