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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의 NEAR 와치] 화해와 공존의 한·중·일 ‘서울 Process’

중앙일보 2015.10.14 00:35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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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왜 한·중·일 국민들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흘겨보고 있는가. 왜 그들은 계속해서 적대 내지 비호감의 감정 세계에 머물러 있는가.

 지난 수십 년간 동북아 3국의 경제관계는 그 긴밀성이 높아지고 생존관계·산업관계의 보완성이 심화됐다. 산업별 부가가치의 사슬 구조도 서로 복잡하게 엉켜 왔다. 또한 지역 내의 문화·예술적 교류, 관광·교육 등의 인적 교류와 시민사회 간의 교류도 더욱 활발해지고 지식 생태계도 더욱 융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사회적 긴밀성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시아의 안보적 갈등은 더욱 거세지며 국민감정의 골도 깊어 가고 있다. 이는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심화가 안보 경쟁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해 온 서구 사회와 정반대 현상이다. 두 지역이 이렇게 서로 상반된 경제·안보 연계성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 사회의 정신세계는 기독교적 사상과 가치관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고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인식과 가치의 공유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장기간의 전쟁 같은 격동기를 거치며 여러 국가가 결속·융합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이로 인해 서구의 동질화는 촉진되고 순혈주의도 상당히 완화됐다. 십자군 운동,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이고 제1·2차 세계대전 중 공동의 적에 대항해 맺어진 연합국, 종전 후 소련에 대항한 나토의 탄생, 그리고 탈냉전 이후 팍스아메리카나에 대응한 유럽연합(EU) 및 유로존의 탄생 등이 모두 서구 사회의 지역주의 확립에 기여한 역사적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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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 과정에서 개별 국가의 독특한 정체성들이 완화돼 유럽 사회에는 하나의 집합된 정체성이 형성됐고, 이것이 경제와 안보 사이의 전도체 역할을 하면서 안보적 긴장 완화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는 이러한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했다. 여전히 각국의 개성 있는 전통적 질서와 가치가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며 배타적 감정 또한 순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다양성 속에서 유교사상은 점점 희미해져 지역 공동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 나라가 공동의 적에 맞서 전쟁을 치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지역 내부의 연합방위의식도 없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보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 대세였다. 또한 냉전체제는 이 지역을 대륙과 해양으로 갈라놓았으며 지금도 같은 흐름에 있다. 아울러 소프트파워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도 동북아시아는 과거의 하드파워 경쟁 시대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불행한 근대사에 대한 짙은 기억으로 역사 문제의 정치화 및 안보화 경향이 뚜렷하며, 그런 역사 문제가 국가 중심의 민족주의를 더욱 촉발시켜 왔다. 특히 한국은 빈번한 외침 속에서 순혈주의와 배타성이 강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유럽처럼 융합된 지역정체성이 시급히 확립돼야 한다. 이를 위해 빈번한 교류와 다양한 대화 채널을 통해 이 지역 구성원들 사이에 높은 신뢰자산이 축적돼야 하며, 이제라도 역사 인식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 역사 문제가 정치화·안보화되지 않도록 강인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또한 과거 집착과 과거 회귀를 버리고 국내 정치가 국민을 민족주의로 오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오랜 시간 인내심을 가지고 이루어야 할 고난도 과제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국의 서로 다른 민족적 기질, 즉 중국의 만방래조(萬邦來朝),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한국의 배타적 귀속의식(歸屬意識)이 장기간에 걸쳐 같이 융합됨으로써 하나의 지역정체성이 형성되도록 유도해 나가야 한다.

 상당 기간 중지돼 온 한·중·일 정상회담이 이달 말께 서울에서 다시 열린다. 이렇게 한·중·일 정상이 모여 갈등을 해소하고 현안을 논의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모임을 갖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앞으로도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3국의 국민들 마음속에 과거에 대한 감정의 응어리가 순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Horizon) 또한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화해와 융합을 모색하는 영향력 있는 순수 민간 대화채널의 활성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중·일 정상회담 직전인 이달 29~30일 서울에서 열리는 순수 민간 차원의 ‘한·중·일 서울 프로세스(Seoul Process)’ 창립회의는 동북아의 화해와 공존을 추구하는 최초의 구상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중·일 서울 프로세스에는 이번 창립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4월 말 서울에서 각국 현인 및 미래 세대 12명씩, 모두 36명이 모인다. 이렇게 외교·안보, 경제, 역사·문화, 환경 등 각 분야 지성들이 함께 모여 각국의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 역사의식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적으로 동질화시켜 나갈 것이다.

 앞으로 한·중·일 정상회담과 한·중·일 서울 프로세스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동북아시아를 번영의 공동체를 넘어 평화의 공동체로 승화시키는 데 전도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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