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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평론가 김문성이 찾은 100인의 기생

중앙일보 2015.10.14 00:10 강남통신 10면 지면보기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한 ‘예인’
기생이란 이름에 숨은 슬픈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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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기생들의 삶을 좇았던 국악평론가 김문성씨. 그의 뒤로 그가 수집한 민요 음반들이 보인다. 김씨 뒤편 오른쪽 맨 아랫줄에 있는 짧은 머리 여성이 김옥심이다. 그는 1996년 우연히 듣게 된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에 반해 소리꾼 기생들의 삶과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우리 소리를 전승한 기생들의 공로를 세상에 알리는 것, 그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것이 나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아리랑을 모르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 아리랑은 지난달 24일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이 아리랑을 부르고 전승한 이들 중 상당수가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국악평론가 김문성(44)씨가 기생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에 반한 20년 전이다. 김옥심은 기생이었다. 김씨는 김옥심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총 100명의 기생이나 그들의 친인척을 만났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기생들은 하나같이 “내가 기생이었다는 걸 가족들이 알면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책을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다음은 그의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와 녹음기 속에 단단하게 결박된 한많은 기생들의 이야기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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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있던 기성권번 외관. 한성권번·종로권번·조선권번과 함께 조선의 대표 권번으로 꼽혔다. [사진 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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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기성권번의 수업 장면. 규모가 큰 권번의 학생 수는 1000~2000명에 달했다. [사진 김문성]



지난달 무형문화재 지정된 아리랑, 고음반 90% 기생 작품
20년간 수소문…“가족이 알면 안 돼 죽기 전에 책 내지 마”
편견으로 얼룩진 인생…음악적 노력까지 폄하해선 안 돼


일제 때 권번 출신 예기, 노래는 물론 외국어 등 고등교육
‘창기’와는 구분…당대 엘리트와 이룰 수 없는 로맨스도
해방 후 무대 줄며 생활고…그들의 한, 아리랑에 담겨 



1996년 서울 동대문구 황학동의 허름한 음반가게에서 우연히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들었던 순간, 김문성씨는 번개가 심장을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머리는 멍했다.

“그간 들어온 음악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이 분을 꼭 만나고 싶다, 만나야 한다. 그런 열망이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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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권번 김옥심은 경기민요 명창이었다. 최초로 정선아리랑 음반을 녹음했다. [사진 김문성]


그 길로 김옥심이라는 소리꾼을 찾아 백방으로 뛰었다. 국악 공연장마다 다니며 김옥심을 찾았다. 만나는 이들 모두 ‘김옥심은 노래를 정말 잘했다’고 하면서도 그 외에는 아무 말도 안 했다. 1988년 타계했다는 것 외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묵계월의 공연에서 첫 실마리를 찾았다.

“처음에는 ‘왜 옥심이를 찾느냐’고 묻던 묵계월 선생께서 ‘김옥심 선생님의 소리에 반했다. 그분에 대해 알고 싶고 더 많은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하자 조용히 전화번호 두 개를 전해주셨어요.“ 하나는 충주의 한정자, 또 다른 하나는 서울의 남혜숙이라는 분의 번호였다.

충주로 전화를 걸자 대뜸 수화기 너머에서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하기 싫다. 도대체 누가 내 번호를 준거냐”는 서슬 퍼런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묵계월 선생의 이야기를 꺼내자 한참 후 충주로 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97년 가을 어느 토요일 아침 일찍 충주로 갔다. 한정자는 정갈한 차림에 꼿꼿한 자세로 사군자를 치고 있었다. 한정자는 원래 소리 잘하고 사군자 잘 치는 기생이었다. 그날 한정자는 난을 모두 친 후에야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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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권번 한정자는 경서도명창(경기·서북지역 소리 명창)으로 사군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사진 김문성]


해방 때까지 한정자는 장국심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소리꾼으로 꼽혔던 명창이다. 해방 직후 대한국악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선 김옥심이 최고의 명창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함께 공연을 다니면 사람들은 김옥심만 찾았다. 자신의 소리에 회의를 느낀 한정자는 얼마 후 소리를 접었다.

한정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김문성씨는 기생 출신 소리꾼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아리랑 음반의 90%는 기생들에 의해 불리고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이유로 아리랑 전승에 기여한 그들의 역할을 폄하하거나 없던 일로 여겼죠. 저라도 잊혀진 기생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남긴 음악을 복원해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기생학교 권번, 원어민 교사도 있었다
 
김옥심·한정자 모두 일본강점기 권번 출신 예기들이다. 몸을 파는 창기와는 다르다. 권번은 기생학교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까지 권번에 다니며 기예를 익혔다.

일본강점기에 생겨난 것이 한성권번·종로권번·조선권번 등 3대 권번이다. 각 권번은 예기와 창기를 엄격하게 구분했고, 예기들은 연희장에서 노래와 춤, 시서화 등을 보이는 일을 했다. 하지만 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이 세 권번을 삼화권번으로 통합하고, 조선 예술 탄압 정책의 하나로 예기에게도 몸을 팔도록 했다. 하지만 뛰어난 예기들은 예기 본연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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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권번 주학선은 가무에 능했다. 일본강점기 주학선의 연봉은 2280원으로 조선총독부 최고위직의 연봉인 1500원보다 많았다고 한다. [사진 김문성]


권번에 들어가는 건 대부분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가난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소위 무당 사주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엔 무당과 기생이 같은 사주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성권번 출신의 경기 명창 주학선 역시 사주 때문에 기생이 된 경우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딸이었던 그녀는 사주를 맹신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한성권번에 입학했다. 딸이 무당 사주라는 점쟁이의 말에 ‘무당을 시키느니, 기생이 낫다’며 학생이던 딸을 권번에 보내버린 거다.

기록에 따르면 주학선은 키가 크고 뛰어난 미모의 소리꾼이었다고 한다. 74년 49세에 암으로 사망했다. 김씨에 따르면 주학선의 친딸은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외할머니를 원망하셨다. 양갓집 규수로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는데 미신 때문에 삶이 틀어진 거다”라고 했다.

권번에 들어가면 각자의 특징에 따라 예명을 지었다. 키가 크면 다리가 긴 새를 뜻하는 한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학선·비봉 등 학이나 봉황을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간 이름이면 키가 큰 기생이다. 얼굴이 예쁘면 사군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특별히 예쁜 얼굴일 경우 꽃 이름을 지어줬다. 영산홍·이화·계월화 같은 이름이다. 또 소리가 뛰어난 기생은 구슬 옥(玉)자가 들어간 이름을 줬다. 옥선·옥심·은주 같은 이름이다. 예외도 있다. 한정자는 그의 스승이 ‘너는 소리가 훌륭해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름을 날릴 것이니 일본식 예명을 지어야겠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기생들은 서로 나이를 밝히지 않는 풍습이 있어서 언니·동생이라 않고 서로를 ‘서방’이라고 불렀다. 묵서방·김서방·한서방 하는 식이다. 권번의 교육과정은 필수교과와 선택교과로 나뉜다. 필수교과는 시서화, 음악, 악기, 춤이었고 선택교과는 체육, 영어, 제2외국어였다. 외국어의 경우 원어민 교사가 직접 가르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이 때문에 가정 형편이 괜찮거나 후원자를 만난 기생의 경우 일본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학파 기생이 평양권번 출신의 왕수복이다. 일본에서 서양음악을 배운 왕수복은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자 김광진의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소설가 김유정의 구애 거절한 박녹주
 
왕수복처럼 화려한 삶을 살다간 기생들도 있지만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경우도 많았다. 평양권번 출신 강명화 자살사건이나 소설가 김유정의 구애로 떠들썩했던 한남권번 박녹주, 비행사 이기연과의 로맨스로 유명했던 이진봉 등의 일화는 기생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연애로 인한 사건들이다. 김씨는 “박녹주 평전을 보면 혈서까지 쓰며 자살소동을 벌인 김유정에게 박녹주가 ‘너는 내가 좋을지 몰라도 네 가족도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라며 구애를 거절하는 구절이 나온다”며 “시집을 가서도 구박받거나 제대로 살지 못하는 기생들이 많았고, 실연당해 자살하는 기생이 많아 강명화 자살 사건 당시에는 기생들의 자살이 사회문제화 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조선권번 이진홍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다. 출중한 외모와 소리로 유명했던 이진홍은 ‘관우물골의 전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특히 이진홍이 아니면 죽겠다며 자살 소동을 벌이는 남자들 때문에 기생 생활에 염증을 느낄 정도였다. 김씨는 이진홍의 양자를 만나 이진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에 따르면 “눈앞에서 자살 시도를 하는 남자들은 물론 정말로 죽어버린 남자로 인해 충격이 커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분이다. 스토커나 다름없는 남자들 때문에 처신 제대로 못하는 기생으로 낙인 찍히고 본인과 상관도 없는 염문설에 늘 휘말려 괴로워했다”고 한다.

최고 소리꾼 김옥심의 안타까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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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명창인 자매 김죽사(왼쪽)와 김정연. 김정연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수심가 예능보유자다. [사진 김문성]


김씨는 지금까지 100명의 기생 이야기를 수집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한정자는 김씨의 간청에 장국심의 번호를 줬다. 장국심은 다시 윤일지홍의 번호를 알려줬다. 그렇게 물어물어 심명화·고백화 등 기생 출신 소리꾼들을 만났다.

묵계월이 한정자와 함께 건네준 또 다른 연락처는 김옥심의 제자 남혜숙의 것이었다. 서울 은평구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어렵게 생활하던 그를 보고 김씨는 ‘괜히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김옥심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62년까지 최고의 소리꾼으로 손꼽혔던 김옥심은 100여 장의 음반을 녹음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68년 제1회 세종국악대상 경서도창부에서도 1위를 할 정도로 실력자였지만 69년 문화재 선정에서 탈락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속히 축소돼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는 김옥심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본래 권번을 졸업한 예기는 돈을 잘 벌었다. 대한국악원이나 방송국의 민요부원으로 활동하면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가요가 등장하면서 소리꾼들의 무대가 줄어들었고, 문화재법 제정으로 문화재 선정에서 탈락한 소리꾼들에게는 설 수 있는 무대가 더욱 좁아졌다. 이는 극심한 생계난으로 이어졌다.

생활고보다 어려운 건 사람들의 편견에 찬 시선이었다. 김씨가 만난 기생 할머니들은 모두 처음에는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화를 내며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기생으로 살아온 삶, 숨기고 싶은 과거사가 드러나는 걸 두려워했다. 대부분은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아예 숨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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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권번 백운선의 민요 음반은 일본에서도 인기였다. [사진 김문성]


김씨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생의 삶을 지난 20년간 계속 찾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기생 출신 음악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예술인으로서 인정받아야 할 이유와 잊혀지는 소리를 복원해 후대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96년부터 20년 동안 매주 주말 전국 팔도의 소리 좀 했다는 기생 할머니들을 찾아다녔다. 한 명 한 명 설득해 사진을 찍고 캠코더에 육성을 담았다. 6개월 동안 김씨를 문전박대한 장국심, 고추밭에서 묵묵히 농사일을 돕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마음 문을 열었던 백운선, 한창때 녹음한 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심명화, 누가 볼까 007작전처럼 몰래 만나야 했던, 매주 찾아가 무릎 꿇고 소리 들려달라고 졸라야 했던 수십 명의 기생 할머니들. 그들은 모두 사회가 준 상처 때문에 마음의 빗장을 걸고 있었다. 그 마음을 김씨는 “선생님 소리가 듣고 싶다. 선생님들 소리가 있어야 후대에도 소리를 전할 수 있다”는 간절함으로 풀어냈다.

김씨가 찾아본 기생의 자손 중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김씨는 “자손들이 모르거나 알아도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며 “기생은 권번에서 고등교육 수준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에 훤했고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기생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 가족에게 헌신하며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마지막 한 분이 세상 떠날 때 공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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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가와 시조에 능했던 현매홍(왼쪽)과 경서도명창 김옥엽. 두 사람은 조선권번 출신이다. [사진 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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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권번 이소향(왼쪽)과 권번 동기. 이소향은 가야금병창(연주하며 노래)으로 유명했다. [사진 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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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명창 이정열(왼쪽)과 이반도화. 기성권번 출신이었다. [사진 김문성]


해방 이후 예기들은 예성사라는 순수 예기 양성소를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연예기획사 같은 곳이다. 여길 통해 많은 수의 기생들이 배출됐다. 이들이 우리 민요와 잡가를 부르며 음반을 취입하고 전승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아리랑 음반 중 가장 오래된 음반은 조모란·김연옥이 부른 ‘긴아리랑’으로 1913년 최초로 녹음됐다. 밀양아리랑은 26년에 김금화가, 진도아리랑은 35년 김소희·오비취가 불렀다. 해방 이후 최초로 제작된 아리랑 음반은 48년에 이은주가 불렀고, 최초의 정선아리랑은 55년에 김옥심이, 영천아리랑은 같은 해에 선우일선이 부르고 녹음했다. 이외에도 이화자, 왕수복, 김옥엽 같은 기생 가수들의 아리랑 음반도 나왔다. 다양한 우리 소리가 있었지만 기생들은 특히 아리랑을 자주 불렀고 좋아했다. 김씨는 “기생들이 유독 아리랑을 많이 부른 건 자신들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해진 곡과 가사가 없는 아리랑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곡이기 때문에 더 많은 기생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리랑에 빗대어 불렀던 것 같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만난 기생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지킬 예정이다. 그들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그가 이야기를 수집한 98명의 기생 출신 소리꾼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2명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모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지는 않겠다고 했다.

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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