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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텃밭이 디자인의 미래다

중앙일보 2015.10.13 01:17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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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가꾸는 디자이너, 농사짓는 건축가 최시영이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태호·남궁선 사진작가]


밭도 예쁠 수 있다는 것 보여주기 위해 밭농사에 뛰어든 건축가가 있다. 밭과 아름다움과 건축가라는 세 조합의 행간이 막연한데, 일 벌인 지 벌써 3년째다.

최시영 리빙엑시스 대표
타워팰리스 실내 디자인 등 명성
경기도 광주서 3년째 ‘이중생활’
논 한가운데에 카페 설계도
“샤넬은 비닐하우스서 패션쇼”


경기도 광주에 있는 리빙엑시스 최시영(59) 대표의 텃밭을 최근에 찾았다. 아침부터 밭에서 일하다 가을볕에 얼굴을 잔뜩 태운 최 대표의 손에는 맥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지난밤 늦도록 공사를 끝낸 건축물의 사진을 찍느라 더욱 그렇다지만, “몸이 지쳐 술 안 먹으면 밭일을 못 하겠다”는 그의 말과 행색이 영락없는 농부였다.

 그의 광주 밭 크기는 약 6611㎡(2000평)에 달한다. 아버지 소유의 땅이었다. 상수도보호구역으로 묶여 개집도 마음대로 못 짓게 했던 땅을 그는 15년 간 방치해뒀다. 땅에 눈을 돌린 건 마음이 지쳤을 때였다. 30년 넘게 해온 건축·디자인 일이 지긋지긋했고, 뭐든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한 발 물러서고 싶었다.

 텃밭 농사에 직접 뛰어든 건 일본 니가타현(新潟縣)에서 열리는 ‘대지의 예술제(에치고쓰마리 아트 트리엔날레)’의 영향이 컸다. 젊은이가 떠나 노인밖에 남지 않은 두메산골의 땅에 전세계 아티스트 150명이 예술제를 열기 시작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곳이다. 디자이너들은 논 가운데 작품을 설치하고, 쌀 포장지를 디자인했다. 최 대표는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앞으로 해야할 몫이 무엇인지 운명처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밭은 언뜻 봤을 때 꽃밭 같다. 블루베리 나무 다음에 바늘꽃이 피어있고, 배추·고추밭 다음에 옥잠화가 보인다. 이처럼 작물 사이로 꽃을 심어놨다. 두메부추 꽃이 올해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는데, 동네 벌이 다 모였다. 벌들의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움직임을 듣고 보고 있으면, 텃밭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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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디자인 어워드 2015’에서 인테리어·건축 부문 본상을 수상한 오피스텔 두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태호·남궁선 사진작가]

 - 밭이 왜 예뻐야 하나.

 “꽃밭이라는 용어는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밭만 있다. 그런데 일본만 가도, 농부들이 밭 한쪽에 꼭 꽃을 심어놓는다. 장터에 가면 작물과 함께 꽃도 같이 판다. 수확을 한 뒤에도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밭을 디자인해서 ‘스페이스텔링’을 하고 싶었다.”

 - 스페이스텔링이 뭔가.

 “공간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잘 디자인한 공간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텃밭도 가능하다. 이미 세계적 브랜드인 샤넬이 패션쇼를 비닐하우스에서 했다. 잘 가꾼 텃밭이 시골의 문화공간 역할을 할 수 있다. 결혼식·전시회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최 대표는 타워팰리스와 같은 유명 주상복합 건축물의 실내 디자인을 통해 주거공간과 관련해 누구보다 앞선 트렌드를 선보여 왔다. 텃밭은 그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디자이너로서 다음 트렌드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셰프 전성시대가 올 거라고 5~6년 전부터 말하고 다녔는데, 예상보다 빨리 왔다. 다음은 셰프 가든 시대다. 텃밭은 천연냉장고다. 당근 요리를 잘하는 셰프가 식당 옆 텃밭에서 바로 수확한 당근으로 요리를 한다면 어떨까. 유명 셰프들 대다수가 텃밭을 갖고 싶다고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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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의 논에 들어선 카페 ‘알렉스더커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태호·남궁선 사진작가]

 요즘 그는 텃밭을 테마로 디자인을 한다. 최 대표가 용인의 시골 마을에 설계한 커피전문점 ‘알렉스더커피’는 이미 블로거들의 순례 공간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카페는 그야말로 논 한가운데에 비닐하우스 모양으로 들어섰다. 방문자들은 ‘카페 안에서 바라본 논이 정말 아름답다’며 입소문을 낸다. 최 대표는 “비닐하우스를 짓는 줄 알고, 주민들이 민원도 안 하더라”며 웃었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 빌딩의 꼭대기인 50~51층에 가든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과 옥상가든도 만들고 있다.

 최 대표는 일주일에 두 번 텃밭으로 출근한다. 텃밭에서 30여 년 경력의 베테랑 건축가는 잡초와 싸우고, 꽃 피우지 않는 식물과 벌레·동물이 파먹은 작물 때문에 애태운다. 텃밭 재배하는 돈을 벌려고 지난해 광고까지 찍었다는 그는 늦둥이 막내아들이 정원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텃밭의 이름을 ‘파머스 대디’로 지었다. 그는 힘들지만 자꾸 오고 싶어진다고 했다. 순리대로 기다리고, 정성을 다하면 응답하는 텃밭에서 최 대표는 삶을 디자인하는 중이다.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시영=홍익대 및 동대학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타워팰리스(1999년), 쉐르빌(2000년), 미켈란(2003년) 등 국내 유명 주상복합 건물의 실내 디자인을 맡아 했다. 경기도 가평 갤러리 하우스 유미재(2008년), 서울 증산동 오피스텔 두빌(2013년) 등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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