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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난민의 눈물, ‘치고이너바이젠’

중앙일보 2015.10.13 00:36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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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교양수업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장 힘든 것이 선곡이다. 디지털 시대 학생들의 사전에는 인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LP나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때야 귀찮아서라도 참고 들었겠지만, 터치 한 번으로 원하는 곡을 골라 듣는 세상이니 3분짜리 짧은 노래도 15초 안에 승부를 걸어야 한단다. 짧아야 10분, 길면 60분이나 하는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것은 그래서 나에게나 학생들에게나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학생들에게 잘 통하는 곡들이 몇 개쯤 있다는 것이다. 어렵고 복잡한 곡인데도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경청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대표적인 곡이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이다. 신나는 비트도 없고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사운드도 없는 바이올린 독주곡이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시의 선율’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집시의 기교와 자유분방하고 격한 정열이 넘치면서도 집시 특유의 애수가 그 밑바닥에 절절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집시 음악에는 다른 노래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격렬함과 처절함이 있다. 특히 안달루시아 집시 음악인 플라멩코는 혼을 쏟아서 내지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절규나 탄식처럼 들린다. 수백 년을 유랑한 끝에 도착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집시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거부와 차별이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 사회에서 이들의 낯선 옷차림과 점술은 악마의 행위로 백안시되고 강력한 처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탄압이 극에 달했던 18세기 말 집시들의 피맺힌 슬픔과 눈물이 쌓여 탄생한 것이 플라멩코다. 플라멩코의 기타 반주가 그토록 화려하고 춤사위가 아무리 정열적이라도 바닥에 묻어나는 짙은 슬픔을 감출 수 없는 이유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적인 집시의 직업인 음악, 보석 세공, 꽃 재배, 말 사육, 조련 같은 분야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시들은 소수인 반면, 대부분의 집시가 구걸이나 좀도둑질을 통해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집시는 유럽의 전 지역에 널리 퍼져 있지만, 유독 헝가리에 집시 문화의 전통이 강하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가면 웬만한 레스토랑에서 집시 바이올린 연주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치고이너바이젠’의 원형인 집시음악도 사라사테가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들은 것이다.

 집시의 터전이었던 헝가리가 이번에는 난민들의 집결지가 되어 몸살을 앓고 있다. 내전을 피해 나온 시리아 난민들이 서유럽의 관문인 헝가리로 모여든 때문이다. 이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및 중동, 아시아 등지에서 온 난민들까지 모두 헝가리로 오고 있다고 한다. 수도 부다페스트의 켈레티역은 이제 거대한 난민촌이 돼 버렸다. 벼랑 끝에 몰린 수천 명의 난민이 몰려들어 모든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니 상황이 심각하다. 다급한 헝가리 정부가 군대까지 동원해 난민들의 유입을 막고 있단다. 헝가리도 답답하겠지만 난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처지도 안쓰럽기 그지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라도 나서서 난민을 받자고 하면 무책임한 허세일까. 난민 신청자들 중에서 4%만 받아들이는 이 인색한 나라에서 가위 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실업과 빈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런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아픈 과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고단하고 슬픈 근현대사에서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힘들게 정착해야 했던 우리 백성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치고이너바이젠’은 나라 잃은 설움에 이국땅에서 목놓아 불렀을 우리네 아리랑과 묘하게 닮았다.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아리랑』에서 느꼈던 민초들의 슬픔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크게 보면 세상에 난민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차피 우리 모두가 인생의 나그네이고 방랑자 아닌가. 조금만 관대해지자. 나누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으니까. 가난한 집시의 선율이 이 가을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는 것처럼.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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