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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역사 교과서 근본 문제는 따로 있다

중앙일보 2015.10.13 00:30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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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역사 교과서로 또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은 국정화를 강행하고 야당과 진보 쪽은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촛불을 들 기세다. 하지만 엉뚱한 곳을 긁는 정쟁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미 전체 교과서 시장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판이다. 교과서 시장도 돈과 사람을 살펴야 그 윤곽이 제대로 드러난다. 다음은 지난 주말 취재한 교과서 출판사 대표들의 이야기다.

 -왜 돈이 문제인가.

 “기본적으로 교과서는 돈이 안 된다. 거기에서 파생된 참고서·문제집을 비싸게 팔아 수익을 맞추는 구조다. 조금씩 개선되던 시장이 2010년 이명박 정부의 ‘수능 EBS 70% 연계’로 초토화됐다. EBS 교재만 불티나게 팔리고 다른 참고서 시장은 반 토막 났다. 한때 과목당 3억~4억원을 투자하던 교과서에 2억원을 투자하기도 힘들다. 질 좋은 교과서는 무리다.”

 -사람은 왜 문제인가.

 “석학이나 A급 교수들은 교과서에 관심이 없다. 교과서 집필이 교수 평가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오히려 논문이나 저서에만 관심이다. 돈도 안 되는 교과서에 손댔다가 괜히 이념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며 몸을 사린다.”

 -어떤 사람들이 교과서를 쓰나.

 “과목마다 교수-현장교사로 구성된 몇 개의 팀들이 있다. 다년간 교과서를 만들어온 선수들이다. 출판사들이 이 팀들을 섭외해 일을 진행한다. 교과서를 왕창 바꾸는 경우는 드물고 새로운 검인정 지침에 따라 부분적으로 손질하거나 디자인·사진·삽화를 바꾼다.”

 -어떤 게 좋은 교과서인가.

 “솔직히 교과서는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이 강하다. 학교마다 교과서는 과목별 교사협의회→학교운영위원회→학교장이 결정한다. 10여 년 전에는 현금봉투가 오갈 만큼 살벌했다. 지금은 많이 맑아졌다. 그럼에도 교과서의 운명은 여전히 출판사 총판의 영업실력에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유독 역사 교과서가 말썽이다.

 “일선 학교에 가보면 역사 교사들의 진보 성향이 좀 더 강한 게 사실이다. ‘교육 운동’ 차원에서 뛰어든 역사 교과서 집필진도 가끔 눈에 띄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 교과서 싸움은 역사적이다. 이념에 치우친 보수·진보 진영이 핵심 뿌리다. 해방 이후 70년간 서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시키려는 투쟁이 반복됐다.”

 -검정 기준을 강화하면 나아질까.

 “큰 기대는 접는 게 좋다. 문제 많은 현 교과서를 체로 거른다고 뛰어난 제품이 나올까?”

 -국정화가 근본 해법일까.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의 날림 교과서보다 좀 더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 또 홍역을 치를 게 뻔하다. 온 사회가 그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를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헌법재판소는 1992년 “국정교과서를 위헌으로 볼 수 없으나 바람직한 제도는 아니다”고 결정한 바 있다. 장기적으로 검인정이 맞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부실한 검인정 역사 교과서를 그대로 두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교과서에 우리 사회 전체의 노력과 투자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에는 노벨상 수준의 석학들이 각 분야의 교과서와 ‘원론’‘개론’을 쓴다. 돌아보면 우리도 1960년대까지 최현배·이병도·이희승 등의 당대 석학들이 교과서를 썼다.

 이제 A급 석학들이 좋은 교과서를 집필하면 뛰어난 연구성과로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또한 적절한 예산 지원으로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전체 교과서의 질을 확 끌어올릴 근본적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학교 설비나 무상급식 같은 하드웨어보다 질 좋은 교과서라는 고품질 소프트웨어가 학생들에게 훨씬 중요하다. 과도한 수능 EBS 연계도 줄이고 말이다. 우리는 한때 학력고사·수능 수석합격자들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지겹도록 들었다. 오늘 따라 이제 박물관에 화석으로 남은 그 말을 다시 듣고 싶다. “학교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만 충실했을 뿐이에요….”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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