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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가는 徐 명인”… 깨알 중계에 웃음보 터진 전화대국

중앙선데이 2015.10.11 00:33 448호 26면 지면보기

1963년 1월 6일 조훈현 초단이 일본의 이시다 요시오 2단과 전화대국을 하고 있다. 전화를 들고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조남철 8단.

기보 조훈현의 흑2가 묘한 착점이다. 보통은 A나 B에 둔다.



한일 친선 소년기사 전화대국. 월간 ‘바둑’의 뉴스 제목이다. 1963년 1월 6일 열 살의 소년 조훈현 초단이 일본의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당시 14세) 2단과 대국했다. 조훈현은 한국일보 사장실에서, 이시다는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帝國)호텔에서 두었다. 이시다는 10년 후 일본의 명인과 혼인보(本因坊)에 오른 인물. 두 기사 모두 천재로 착상이 발랄했다(기보 참조).


[반상(盤上)의 향기] 원격 바둑의 등장

당시의 관전기를 보자. “상오 10시 25분 전화 벨 소리가 긴장된 대국장 분위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상대도 없는 바둑판 앞에 홀로 앉아 반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열 살의 소년, 가득한 관전객, 간단 없이 터지는 보도진의 플래시. 그야말로 압박과 흥분이 엇갈린 분위기였다. 도쿄 대국장엔 기타니(木谷) 부처와 내제자 10여 명, 그리고 보도진으로 역시 가득 차 있었고… 조치훈은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한국일보의 장기영 회장이 실현시킨 대국이었다. 장기영은 배포 큰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안목이 넓고 힘이 있었다. 바둑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바둑의 힘을 간파해 바둑의 사회적 가치를 알아챘다. 63년은 한일협정 체결 2년 전. 전화대국은 과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1977년 1월 9일 윤기현 7단과 조치훈 7단이 국제전화 대국을 했다. 한국일보는 신문사 뒤뜰에 높이 14M의 대형 속보판을 세워 수순을 중계했다. 속보판 위에 ‘두 천재 기사의 역사적 국제전화 대국’ 이라고 쓰여 있다.



그는 이후에도 전화바둑을 몇 번 성사시켰다. 76년 4월 4일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봉수 4단과 조치훈 7단의 전화바둑도 그가 기획했다. 당시 서울쪽 대국장은 한국일보사 10층 사주 장기영의 방. 중계실은 옆방. 일본은 도쿄 데이코쿠호텔 701호실. 서울 측 송화인(送話人)은 하찬석 국수. “흑 뒀습니다. 십육의 사, 주로꾸노시(十六の四).” 도쿄 측 송화인은 조두흠 특파원. “백 뒀습니다. 삼의 십칠. 산노주시치.(三の十七).”



긴장돼 있던 중계실에 잠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서 명인, 화장실에 갔습니다.”



예산 명세는 이랬다. 서 명인 대국료 50만원. 조 7단 100만원. 일본기원에 지불한 대국 승인료 5만원. 대한기원에 지불한 대국 승인료 15만원. 조남철 8단 해설료 20만원. 서울 측 대국실과 중계실 진행비 6만원. 국제통화료 약 30만원. 일본 측 대실료와 진행비 합해, 모두 300여 만원.



 

일본에서 전화로 대국을 기록하는 모습.



일 문부상과 독일 교사 52일간 전보 대국바둑은 손으로 두는 것. 눈과 귀는 물론 몸을 열어놓고 상대와 반응하는 것. 근대까지 바둑은 그랬다. 상대와 직접 만나서 두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대국의 조건을 크게 바꾸었다.



1933년 일본의 문부상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 54~56년 일본 총리)와 독일의 수학 교사 펠릭스 뒤발(Felix Dueball) 간에 전보대국이 있었다. 모두 52일에 걸쳐 두었고 하토야마가 7집을 이겼다. 독일에서도 흥미를 크게 끌어 바둑을 모르는 유명 주간지들도 매주 일요일마다 기보를 게재할 정도로 뉴스거리였다.



대국이 이뤄진 사정은 이랬다. 펠릭스 뒤발은 우연히 바둑을 배운 후 1918년 바둑책을 쓰고 재직하던 고등학교에 바둑부를 신설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얼마 안 가 약 50명의 바둑인이 베를린에 생겨났다. 유럽에서 바둑 모임으로는 첫 번째였다. 독일에서 뒤발을 알았던 일본인이 귀국 후 이 사실을 일본기원에 알리자 총재 오쿠라 기시치로(大倉喜七郞)가 뒤발 부부를 초대했다. 뒤발은 일본기원 아마 3단을 인정받았고 그가 독일로 돌아오자 신문들이 앞다투어 보도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은 국제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깊었다. 둘 다 국수주의적이고도 팽창지향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바둑은 두 나라의 우호 관계를 알릴 좋은 소재가 되었다. 독일에선 1939년 바둑 인구가 5000명까지 늘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은 급성장한 독일 바둑계에 치명타를 입혔고 2015년 현재 독일의 바둑 인구는 약 1만~2만. 참고로 바둑이 미국에 전해진 것은 1860년. 필라델피아에서 일본 외교관들이 처음 소개했다.



 



신문에 백지 기보 싣고 대국 중계문명의 역사는 몸으로 한정된 존재가 몸을 넓히는 과정이다. 수저는 손과 입의 연장이다. 자동차는 발의 연장이다. 그 시각에서 보면 전화와 전보는 입과 귀의 연장이다.



1899년 8월 31일 요미우리(讀賣)신문 바둑란에 수순이 단 한 수도 표시돼 있지 않은 백지기보(白紙棋譜)가 실렸다. 내일부터 도쿄의 이와사키 겐조(巖崎健造) 7단과 오사카의 이즈미 슈세쓰(泉秀節) 5단이 전보를 통해 바둑을 두니, 독자는 매일 수순 중계를 들으며 스스로 기보를 작성해 보라. 역사상 최초의 전보바둑이었다. 도쿄 긴자(銀座)에 있는 신문사 건물 외벽에는 다다미 2조 크기의 대형 바둑판이 걸렸고 매일 새로운 수순을 내걸었다. 대국은 9월 1일~12월 8일 99일에 걸쳐 이뤄졌다. 이즈미 5단이 이겼다. 흥행에 성공한 요미우리는 동일한 대국자 간의 제2회 전신바둑을 개최했다.



라디오도 이용했다. 1934년 1월 21~25일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우칭위안(吳淸源) 5단과 구보마쓰 가쓰키요(久保松勝喜代) 6단과의 대국을 라디오로 중계했다.



한국에서는 1957년 제2기 국수전 도전 1국 때 동아일보가 백지기보를 냈다. 내일 중계방송이 있으니까 독자들은 기보에 기입하면서 보라. 동양방송 아나운서실장 박종세 아나운서가 중계했는데 “13의 2에 놓았다”는 식으로 착수를 알렸다.



 헬기로 참호까지 바둑 편지 배달한국 최초의 바둑 월간지 ‘기원(棋苑)’을 창간한 최태열 육민사 사장은 바둑 경력이 다양했다. 그는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의 『바둑의 묘』 시리즈 6권과 『귀수묘수(鬼手妙手』 『오청원의 포석』 등 수준 높은 책을 펴내 한국 바둑의 질을 크게 높였다. 67년엔 월간 바둑세계를 창간했고 바둑 잡지 월남 보내기 운동을 벌여 각계의 협조로 오랫동안 상당한 부수를 월남전선에 골고루 배부했다.



그의 바둑 인생 중에서 가장 감명 깊은 일을 묻자, 그는 “나는 서슴지 않고 월남과의 서신대국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에세이(바둑 69년 5월호)를 간략히 돌아보자.



“66년 어느 날, 면식도 없는 맹호부대의 양이국 병장이 편지를 했다. 바둑광으로 여가를 바둑으로 달래고 싶은데 ‘기원(棋苑)’을 보내 달라. 때마침 ‘기원’은 휴간 중이었다. 그래, 대신 서신으로 나와 대국하면 어떠냐. 그러고선 편집용 기보지에 우상귀 소목 제1착을 그려 보냈다.



편지 왕복 일자는 15일. 한 달에 겨우 네 수. 고국 이야기와 월남전선 이야기가 들어가고 날이 갈수록 서로 친근해졌다. 소문은 부대에 퍼져 편지가 도착하면 전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부대장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도 받았다.



편지 도착 시일이 늦어지면 몹시 초조했다. 신상과 건강이 염려됐다. 어느 때인가는 약 두 달간이나 서신이 두절됐다. 불안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알고 보니 맹호 5호 작전으로 최전선에 나가 있었다. 기보지는 부대본부에서 고지의 아래턱까지 트럭으로 운반했고 그곳에서 다시 헬리콥터로 참호까지 배달됐다.



양 병장이 귀국할 때까지 꼬박 1년 반을 계속했지만 겨우 38수까지만 두었다. 양 병장은 귀국 후 관절염으로 누운 나를 찾아왔다. 육친 이상의 따뜻한 정을 느꼈고 며칠 후 우린 운당여관에서 대국을 끝냈다. 승부는 맹호 용사의 기백에 눌리고 말았다.



사연은 주간한국에도 나왔고, 동양TV에도 방송됐다. 전우신문에서도 나의 수기를 연재해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실로 나의 일생 중 가장 감명 깊었던 한 순간이었다.”



 



인터넷 등장 후 바둑 지평 급속 확대한국은 57년 TV 방송국이 탄생했을 때 프로그램으로 바둑을 넣었다. 불과 10분 안팎이었지만 58년 1월 25일 밤에 조남철 7단이 바둑평론가 유해수와 짝을 지어 카메라 앞에 섰다. 아쉽게도 프로그램은 흐지부지 없어졌다. 본격적인 방영은 KBS-TV가 남산에 건립된 후였다. 64년 7월 6일부터 ‘TV기원’이 매주 일요일 밤 각계 유명 인사들의 대국을 방영했다. 70년대엔 프로기전이 탄생해 TBC왕위전과 MBC국기전이 서로 맞섰다. 마침내 95년 바둑TV가 개국했고, 이제 그것은 인터넷과 함께 바둑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산은 둘러가도 강은 둘러가지 못한다. 그렇다. 강은 둘러가지 못하니 건널 수밖에 없다. 직접 넘어서야만 하니 강은 곧 난관이다. 『주역(周易)』에 “강을 건너니 이롭다(利涉大川)”는 점사가 많은 까닭이다. 인간은 기술로 난관을 극복해왔다. 바둑도 기술의 성장에 힘입어 성장해왔다.



조선시대에 도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둔다는 도기(道棋)나 군에서 잘 둔다는 군기(郡棋)와 같은 이름도 환경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파발마 시대의 이름이었다. 자동차 앞에서는 도기나 군기는 사라지고 단급(段級)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급을 기준으로 실력 차이를 재보는 것도 넘어섰다. 프로 세계는 단이 아니라 랭킹으로 기사의 등급을 매길 정도로 변했다. 실력 차가 좁혀져 단 차이가 의미 없게 된 때문이다.



88년 후지쓰배, 89년의 응씨배에서 시작된 국제대회도 역시 교통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 어디에서 대회를 열든 모두 하루 만에 모일 수 있다.



구한말 국수들은 상대를 찾아 집을 나서 전국을 유랑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이젠 옛이야기. 요즘엔 집에서 아내 눈치 봐가며 인터넷으로 두는 것이 보통이다. 모바일 앱으로도 지구 저편에 사는 친구와 쉽게 바둑을 둘 수 있는 시대. 지난 100년 바둑의 거리는 한없이 좁혀졌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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