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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덕수궁에서 만난 선조대왕과 고종황제

중앙일보 2015.10.08 10:13
며칠 전 국내 신문에 덕수궁에서 황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의 사진이 보도되었다. 110년 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에게 선물한 초상화가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서 2년 전은 선조의 환도(還都) 7주갑(60년이 7번 지난 420년)이 되는 해였음이 생각난다. 모두 덕수궁에 얽힌 이야기이다.

임진왜란으로 황급히 서울 떠난 선조가 1년 후 환도한 곳이 지금의 덕수궁인 ‘정릉동 행궁’이다. 정릉동은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사랑하던 신덕왕후 강(康)씨의 무덤을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위에 만들어 놓고 정릉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영국 대사관 근처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이방원은 눈에 가시처럼 보인 정릉을 한양 밖으로 내 보낸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임금 세조는 정릉의 남쪽 과거 정릉의 원찰(願刹) 흥천사가 있던 곳에 혼자 된 며느리 수빈 한씨를 위해 사저(私邸)를 마련해 주었다. 사저라고 하지만 왕족이 살아도 좋은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수빈 한씨는 20세에 요절한 세조의 큰 아들 도원군( 후에 의경세자)의 부인으로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의 어머니였다. 결혼 5년 후 세조가 왕이 되면서 세자빈이 되어 입궐하였다가 2년 후에는 남편을 잃고 퇴궐해야 했다.

세조로서는 며느리 수빈 한씨가 일찍 남편을 잃은 안쓰러움도 있었겠지만 며느리의 친정아버지 한확(韓確 1400-1456)을 생각하면 뭐든지 해주어야 할 입장이었다. 사돈인 한확은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계유정난(1453)을 성공시켜 자신이 왕이 되는 데 일등 공을 세운 사람이다. 더구나 명(明)나라에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였다하여 왕으로 책봉하지 않겠다는 것을 한확이 직접 책봉사로 베이징(연경)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양위라고 설득하여 황제의 고명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귀국 도중 병을 얻어 객사한 공신 중의 공신이다.

서울에서 양평을 가다 보면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이 나온다. 새도 쉬어간다는 조안면은 V자 형의 모양이다. 이 꼭지점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팔당호를 만든다. 꼭지점의 동편이 조안리이고 서편이 능내리이다. 능내리에 가면 온통 다산 정약용 이야기 뿐이다. 능내리가 다산리처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산의 생가 그와 관련된 기념관이 즐비하다. 다산은 서울 관직과 지방의 유배생활을 빼면 이곳에서 태어나서 노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능내리에 임금도 아닌 한확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확이 어렵사리 책봉 고명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과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세조는 급히 사람을 보내 시신을 국내로 운구케 하였다. 그리고 왕실에서 준비해둔 왕릉을 한학의 묘소로 하사하였다. ‘능내리’라는 마을 이름은 왕릉 같은 한확의 묘소에서 유래된다.

한확의 아버지 한영정은 딸이 많았다. 그런데 딸들의 미모가 모두 특출하여 멀리 명나라 조정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미모가 빼어 난 조선의 처녀들을 공녀라는 이름으로 베이징으로 데리고 갔다. 한확의 누님도 공녀로 베이징에 끌려갔다가 영락제의 마음에 들어 후궁(麗妃)으로 간택된다.

누님을 호송하여 베이징에 간 한확은 여비가 된 누님 덕에 명의 벼슬을 받고 귀국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한확은 세종의 즉위와 함께 세종의 책봉 고명을 받아 왔다. ‘장자승계의 원칙’을 깨고 장남이 아닌 세종은 책봉 고명을 받아 온 한확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였다. 한확이 잘못이 있어도 ‘나는 그를 벌할 수 없는 처지’라고 솔직히 털어 놓은 적도 있다. 1420년(세종2년) 흉작으로 명에 바칠 공물의 부담이 컸다. 한확은 다시 명에 가서 공물면제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돌아왔다. 한확은 조명(朝明)외교의 두툼한 파이프로 골치 아픈 외교문제를 척척 해결하였다.

1424년 영락제가 베이징 북쪽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북정(北征)중 과로로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금성에서 영락제의 사망소식을 들은 여비한씨는 영락제의 죽음을 슬퍼하다 못해 목을 메어 자살, 지아비와 함께 순장되었다. 베이징 교외 명십삼릉(明十三陵)의 장릉(長陵)에는 여비한씨가 영락제와 함께 묻혀 있다.
영락제의 손자인 선종 선덕제가 여비한씨의 절개를 높이 사서 그녀의 여동생이며 한확의 누이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이다. 선덕제는 영락제가 총애하는 손자로 아버지 홍희제가 영락제의 눈 밖에 났는데도 황태자의 지위를 지킨 것도 손자를 총애해서라고 한다. 선덕제는 할아버지 영락제의 원정에 항상 동행하였고 영락제를 임종한 유일한 혈육이었다.

공신부인 한씨는 한확보다 10세 아래 동생으로 17세 때 베이징으로 와서 명의 4대 조정을 지키면서 74세까지 장수하여 명과 조선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황실 별궁이 있던 베이징의 향산(香山)에 있다. 한확이 대명 외교 채널이 된 것도 황제의 후궁이 된 그의 누나와 누이동생 덕이라고 볼 수 있다.

공신부인 한씨는 생전에 아름다우면서 온화 유순하고 말을 삼가며 자금성 내의 여사(女師)로 존경 받았다고 한다. 향산에 있는 비문에는 그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생호동국 진호중원 (生乎東國 進乎中原)
(본래 조선에서 태어나서 중국으로 출가하여)
공사천부 매옥향산 (恭事天府 埋玉香山)
(매사 공손하게 조정에 봉사하고 향산에 묻혔으니
부인지증 미시지반 (夫人之贈 美諡之頒)
(부인으로 추증되고 아름다운 시호가 내려졌다)

공신부인 한씨의 질녀인 수빈 한씨가 정릉동에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1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1468년 세조가 병이 위중해 둘째 아들 예종에게 양위한 후 다음 날 승하한다. 그러나 예종도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다음 왕위는 의경세자의 두 아들 중에 장남인 월산대군에게 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수빈 한씨의 양해를 얻어 자을산군을 왕이 되도록 한다. 그가 성종이다.

동생은 왕이 되고 어머니가 인수대비가 되어 입궐하자 월산대군은 정릉동 집을 지키면서 산다. 월산대군이 죽은 후 100여년이 지나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울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하였다. 다행히 명나라의 지원을 받고 의병의 분전으로 1593년 1월 서울을 수복한다. 선조는 그해 11월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의 궁궐은 모두 불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선조는 과거 월산대군이 살던 집을 임시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는다. 이곳은 명 황제의 후궁 여비한씨와 공신부인 한씨의 친정이었던 곳이다. 선조는 이곳 행궁에서 15년간 살다가 승하하였다. 세자 광해군이 ‘정릉동 행궁’에서 즉위하고 3년 간 행궁에서 지내다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임금이 옮겨 사는 것)하면서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경사와 운이 같이 트이기를 바라는 작명이다. 처음으로 경운궁이 역사에 등장한다.
광해군은 영창대군 추대사건을 빌미로 계모 인목대비를 폐하고 경운궁 석어당에 유폐시킨다. 1623년 이귀 최명길 등이 인목대비의 후원 하에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내세운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에서 왕으로 즉위한다. 인조는 즉위한 후 8일 만에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월산대군의 후손에게 건물과 토지를 돌려준다. 경운궁은 다시 한적한 별궁으로 남는다.

선조가 명 황제 후궁의 친정집(정릉동 행궁)으로 환도한 것은 명의 위세를 빌려 왜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再造)는 숨은 뜻이 엿보인다. 조선의 역대 왕들도 경운궁을 자신들의 왕계가 시작된 곳으로 특별하게 여겼다. 임진왜란의 수모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히 영조는 1773년 3주갑(180년) 행사를, 고종은 1893년 5주갑(300년) 행사를 거행하였다.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의 세력다툼으로 조선 왕조는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일본은 친 러시아로 기울어 가는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20년 전 1895년 양력 10월8일이었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1년 후 고종이 다시 환궁을 해야 할 때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다.

선조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릉동 행궁’에서 다진 왜군 격퇴와 재조(再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움)의 각오와 마찬가지로 고종도 일본의 침탈 위협 속에 미국 영국 러시아의 세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했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순종황제에게 양위한 1907년까지 10년간 경운궁에서 지냈다. 집무실은 즉조당이고 침실은 함녕전이었다. 1897년 고종은 태극전으로 이름을 바꾼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언한다. 고종은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법궁(정궁)이 되기위해 창덕궁처럼 2층 구조의 중화전을 짓고 품계석을 놓았다. 그리고 중화전에 들어가는 중화문과 함께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을 세웠다. 영국의 설계사 J R 하딩을 시켜 석조전이라는 콜로니얼 스타일의 양식 전각을 건축한다.

1904년 4월 고종 황제의 침소인 함녕전의 온돌에서 발화되어 경운궁의 많은 전각이 불탔다. 다시 재건해야 했다. 경비 절감을 위해 2층 중화전은 단층구조로 지었다. 금천교 앞의 인화문은 재건하지 않고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새로운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의 한(漢)은 운한(雲漢) 또는 소한(?漢) 즉 하늘을 의미하여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연결 국조연창(國祚延昌)의 염원을 담았다. 1907년 새로이 황제가 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남겨진 고종황제의 장수를 기원하여 궁호를 덕수궁으로 개명한다. 경운궁이 고종황제의 정치의 중심이었다면 덕수궁은 은퇴한 황제가 여생을 보내는 조용한 별궁이었다.

고종황제의 승하로 일본 총독부는 수많은 전각을 헐어내고 경기여중고와 덕수초등학교를 이전시키면서 덕수궁을 크게 축소시킨다. 해방 후에는 태평로의 확장으로 대한문을 멀찌감치 뒤로 물리면서 오늘의 규모가 되었다.

고종황제는 선조와 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궁을 옮기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본격적인 재조의 기회를 삼으려고 했지만 청국에 이어 러시아도 무너지면서 아시아의 세 마리 호랑이 중 유일하게 일본 호랑이만 남게 되었다. 결국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한 곳도 경운궁의 한 전각인 중명전이었다. 선조가 경운궁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재조의 성공을 거두었다면 고종은 불운하게도 경운궁에서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만 셈이다.

300여년을 사이에 두고 경운궁과 일본과의 특별한 인연에 마음이 불편하다. 덕수궁 아니 경운궁을 보면서 동아시아에서 강대국 사이에 낀 조선의 운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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