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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좀비기업 살리며 TPP시대 대응할 수 있나

중앙일보 2015.10.08 00:30 종합 34면 지면보기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 방향을 좌우할 글로벌 경제의 큰 틀이 바뀌고 있다”며 ‘비상한 인식과 각오’를 주문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중국의 경제불안이라는 주요 2개국(G2) 리스크가 부각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경제와 무역의 기준이 바뀌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응해 ‘외부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로 경제구조를 바꿔야 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대통령이 강조한 것처럼 구조 개혁은 한국 경제의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다. 정부와 여당도 이를 명분으로 공공부문 개혁과 노동개혁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고질이자 산업구조 개편의 핵심인 좀비기업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경제개혁의 효과를 기약할 수 없다. 신용보증기금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이상 신용보증기금의 장기 보증을 받고 있는 중소기업이 지난 8월 말 3741개에 달했다. 이들의 보증금액만 2조4000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20년 이상 보증을 받고 있는 기업이 600개, 30년 이상 된 기업도 6개다.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정책금융이 만성적 한계기업인 ‘좀비기업’을 연명시키는 수단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영업수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기업이 지난해 말 전체 기업의 15.2%인 3295개였다. 이 중 10년 동안 한계기업에 오르내리는 기업도 73.9%나 된다. 대기업 6곳 중 한 곳이 좀비기업인 시장에서 정상적인 경쟁과 효율성 제고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기업이 특히 많은 철강·조선·해운 업계에선 “좀비기업이 멀쩡한 기업까지 잡는다”는 아우성이 가득하다. 개별 기업을 살리려다 산업을 망치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될성부른 산업을 키우거나 일시적 어려움에 빠진 기업을 지원한다는 정책금융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좀비기업 지원은 TPP 가입에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참가국들은 ‘국영기업 지원 제한’을 협정의 주요 항목으로 다뤘다. 국영기업에 대한 정부의 특혜를 축소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운영하라는 주문이다. 가입 협상 과정에서 기존 참가국들이 산업은행이나 신보를 통한 기업 지원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좀비기업을 정리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좀비기업은 경제적 이유로 양산된 게 아니다. 해당 기업 및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역대 정권들이 정치적으로 연명시켜준 경우가 적지 않다. 정부와 금융위원회가 아무리 좀비기업을 정리하라고 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생부터 개별 부처의 역량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인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이제라도 좀비기업 해결을 국정과제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활력 회복과 창조경제 활성화도 가능하다. 썩은 나무가 햇빛을 가리고 서 있으면 죽은 숲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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