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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노래’(1955)

중앙선데이 2015.10.04 00:54 447호 24면 지면보기

2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죽음은 삶의 또 다른 결이자?후세대가 마주할 세계의 시작

아푸는 벵골의 시골 집성촌에 사는 어린소년이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아푸와 그의 누나 두카는 벌판과 마을을 쏘다니며 성장해 나간다. 여느 때처럼 벌판으로 나선 두 남매는 기차를 보고 흥분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격한 고모할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떠나고, 어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사이 마을에 내린 폭우를 맞으며 춤을 추던 두카가 폐렴으로 죽고, 아푸의 집은 폐허가 된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결국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벵골의 자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의 ‘길의 노래’는 인생과 자연이 닮아 있음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영화다. 이 작품은 아푸라는 소년의 일대기를 담은 레이 감독의 ‘아푸 3부작’ 중 1부다. ‘아푸 3부작’은 바라나시와 같은 대도시를 무대로 삼을 때조차 죽음이라는 가장 자연적인 요소를 녹여낸다. 1부에서는 고모할머니 아운티와 누이 두카의 죽음을, 2부에서는 부모님의 죽음을, 3부에서는 아내가 출산 도중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은 극적인 드라마의 형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아푸 3부작’은 죽음이야말로 자연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생명력과 교차하는 죽음의 미학사티야지트 레이의 놀라움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 문명이 추방시킨 죽음을 편안하게 영화 안으로 들여온다. 아푸는 누나 두카를 따라 벌판에 나가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목격한다. 소년 아푸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거대한 기차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것은 문명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적(문화적) 요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모할머니의 죽음을 보게 된다. 이 두 가지 충격은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우리는 매번 새로운 것에서 충격을 받고, 낡은 것들에서 인생을 얻는다.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것은 곧 낡은 것이 되고, 낡은 것은 후세대를 성장시키는 경험의 각질이 되는 법이다.

1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



‘길의 노래’에는 소년이 목격하는 충격의 장면들뿐만 아니라 일상의 풍경도 고르게 포함되어 있다. 쓰러져가는 가옥에 머물러야 하는 가난한 삶, 귀가한 아버지가 풀어놓는 선물 보따리가 주는 행복한 삶, 폭우 속에서 비를 만끽하는 충만한 삶, 다양한 동식물 등 벵골 특유의 보편적 삶의 모습을 다양한 표정으로 보여준다. 동생 아푸의 탄생을 기쁜 눈으로 바라보던 두카의 표정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모여 삶을 이룬다.



3부작 중 ‘길의 노래’는 아푸의 어린 시절을 다룬다. 3부작 전체의 주인공은 분명 아푸이지만 1부인 ‘길의 노래’에서는 아푸를 돌보는 누나 두카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두카는 고모할머니를 위해 이웃집 과수원에서 몰래 망고를 따오고, 결혼식을 올리는 친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성장담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뜻밖의 죽음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 벌판에서 송전탑을 발견한 아푸와 두카.



진짜 삶은 연출할 수 없는 법레이 감독은 소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을 세밀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소녀는 엄마에게 구박을 받는 고모할머니가 마음 편히 살기를 바랄 뿐이고, 시골에서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길 소박하게 꿈꿀 뿐이다.



하지만 성장하는 소녀의 표정은 3부작을 통해 펼쳐질 아푸의 표정을 예감하게 한다. 일보다는 시와 연극 대본을 쓰고 싶은 순진한 아버지나 가난에 찌든 어머니의 피로한 표정과는 다르다. 소녀의 생기발랄함은 ‘길의 노래’의 주요한 가락을 이루며 변주되는 아푸의 가족상을 보여준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동생을 위해 벌판으로 나가 기차를 보여주고, 폭우 속에서 함께 노는 장면은 시적 인상 그 자체다. 아푸는 누이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 홀로 벌판에 나간다.



레이의 영화는 흔히 떠올리는 인도 영화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도 영화는 춤과 노래가 주를 이루는 마살라(masala) 장르를 중심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길의 노래’는 벵골 지역에서 3년이 넘는 촬영 기간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것은 영화 속 아버지의 대사처럼 과거의 신화와 전설에 의지한 구습의 반복이 아니라 동시대인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 결과였다. 그의 카메라가 꿈꾼 것은 연출되지 않는, 연출될 수 없는 삶을 담는 것이었다.



감독의 고향이자 인도의 동부 지역인 벵골은 봄베이를 중심으로 한 인도와는 다른 언어와 관습을 지녔고, 그것은 곧 변방이라는 뜻으로 통했다. 하지만 레이는 첫 영화로 칸영화제 수상뿐만 아니라 인도 내에서도 흥행을 이끌어내면서 새로운 인도 영화의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영화를 통한 삶의 찬가였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모든 장면에 젖어 남는 것은 침묵뿐?진정 중요한 건 말로 전할 수 없어



거실의 낯익은 풍경 하나. 아들을 심하게 야단친 다음 뒤따르는 아비의 부드러운 장광설. 불쑥 휘두른 손찌검에 아들의 반감이 걱정스러웠을지 모른다. 이때 빠지지 않는 말, 사랑의 매. 감정적으로 저질렀던 폭력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는 이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믿기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사랑의 매’라는 데야 어린 아들이 어쩌겠는가. 한편으로는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때렸다는 말이 아들로서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들의 마음 깊은 곳, 그곳에선 이미 다른 목소리가 자란다.



위대한 작품은 관객의 영혼을 흔든다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라면 쓸데없는 장광설일랑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지친 아들을 업어주거나 아들의 짐을 대신 들어주면 된다. 그저 아들의 손을 오래도록 꼭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본다. 그리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낀다.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말로써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위대한 감독은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억지 계몽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반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영화를 마주할 때 관객은 쉽게 감동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포함한 모든 위대한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관객의 머리에 무언가를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흔들어버리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혼이 흔들렸는데 어찌 머리가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사티야지트 레이를 만난 순간, 그런 힘을 느꼈다.



영원히 타오르는 언어의 도가니 아니면 영원토록 깊은 침묵, 오직 둘 중 하나만을 허용하는 영화가 있다. ‘길의 노래’가 끝나자, 어떤 말로도 이 매혹적인 영화를 꽉 채울 수 없으리라는 허탈감이 나를 감쌌다.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보여주니 그저 볼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의 노래’가 보여주는 모든 것이 가슴에 미묘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마치 나의 삶을 노래한 듯 내게 깃들어버린 것이다.



‘길의 노래’는 지금껏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의 나를 불러냈다. 정확히는 유년의 내가 아니라 당시의 ‘누나’, 혹은 ‘누나와 나’를. 박정희 개발독재가 한창이던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이 목마름을 채워준 존재가 바로 ‘누나’였다. 코를 닦아준 것도, 어머니에게 맞은 나를 품어준 것도 누나였다.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분명 ‘누나 콤플렉스’(sister complex)를 들먹였을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을 누나에게 투사하며 ‘상상적으로’ 얻었다 했으리라. 맞는 말이다. 누나가 내게 애정과 관심을 준 것보다 내가 그녀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애정과 관심이 수십 배나 크기 때문이다.

4 새로운 세상을 응시하는 아푸. [사진 마티]

이웃집 과수원에서 훔친 과일을 고모할머니에게 주는 두카.



소년의 자아 성장시키는 인큐베이터레이 감독은 있는 그대로의 소녀 두카와 아푸의 눈에 비친 누나 두카를 교차시켜 보여준다. 누나 두카는 아푸에게 과일을 먹이고 머리를 빗겨준다. 기차를 보여주고, 비를 맞아 떠는 동생을 품에 안는다. 아푸에게 누나는 대지의 여신처럼 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존재다. 반면, 소녀 두카는 과일을 훔치고, 이웃집 아이가 애지중지하던 목걸이를 훔치고,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오라며 남동생을 부채질한다. 누나 두카와 소녀 두카. 아푸에게 두카는 누나로서 충분했다. 소녀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팍팍한 시절이 그나마 살 만해질 테니까.



아푸는 분명 ‘누나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 그렇다 한들, 누가 이 콤플렉스를 나무랄 수 있을까. 누나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면, 다시 말해 누나 두카가 사라지고 소녀 두카만이 남는다면, 아푸의 유년은 남루하고 궁핍해질 것이다. 어린 아푸에게 ‘누나 콤플렉스’는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자신을 보호해줄 인큐베이터였던 것이다.



어찌 아푸에게만 해당될까. 누나를 가진 거의 모든 소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심리 아닐까. ‘누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오랜 동요가 아직도 입 안에 맴돈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돈을 던지자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주어라.”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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