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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 벗고 심장 터지게 춤만 춥니다

중앙선데이 2015.10.04 00:51 447호 16면 지면보기



올 가을 현대무용계의 핫이슈는 발레 무용수들이 만들고 있다. 김지영(37)과 엄재용(36).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두 간판스타가 현대무용 공연으로 짝을 이뤘다. 안무가 정영두의 신작 ‘푸가’(10월 9~11일 LG아트센터)에서다.‘제 7의 인간’‘먼저 생각하는 자-프로메테우스의 불’ 등 메시지 강한 작품을 선호해 왔던 정 안무가가 오랜만에 춤 자체에 집중하는 무대를 만들며 최고의 발레 스타들을 기용한 것이다. 여기에 김지혜·최용승·하미라·도황주 등 현대무용수 4명과 ‘댄싱9’의 스타 발레리노 윤전일까지 가세해 ‘따로 또 같이’ 바흐의 푸가를 몸으로 구현한다.


현대무용으로 첫 만남, 발레 무용수 김지영·엄재용

이 둘은 국내 양대 발레단에서 각자 15년 이상 주역으로 활동해 왔지만 함께 춤추는 것은 처음이고, 본격적인 현대무용 무대도 처음이다. 각자의 둥지를 떠나 발레도 아닌 현대무용 도전을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은 과연 어떤 호흡을 선보일까.





두 최고참 수석 무용수의 조합은 오묘했다. ‘국립의 공주’ 김지영이 앓는 소리를 하면, ‘유니버설의 왕자’ 엄재용이 듬직하게 버텨줬다. 좁은 무용계에서 부딪치며 ‘한번쯤 파트너로 만나고 싶다’는 로망을 품고 있었다는 두 사람의 무대 위 ‘케미’가 더욱 궁금해졌다.



“뉴 페이스를 좋아해서 기대가 많았거든요. 발레처럼 둘만 길게 엮이는 게 아니라 좀 다른데 이렇게라도 만나니까 좋네요. 딱 잡아보면 알거든요. 듣던 대로 재용이가 배려심이 뛰어나요.”(김)



“사석에서 만날 때마다 국립이랑 유니버설이 파트너를 바꿔서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만 많았죠. 이번에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누나가 앞에서 느끼는 거나 제가 뒤에서 느끼는 거나 똑같을 거에요. 아무리 남자가 잘 잡아도 여자가 경험이 없으면 안되니까요.”(엄)



오랜만에 외부작업에 나서니 어떤가요. 엄: 저는 발레단 밖으로 나와서 모던을 해본 적이 없어요. 밖에서는 클래식 갈라만 했었지 이런 모던 작품을 제로부터 만들어 가는 건 처음이라 의미가 있죠. 김: 발레단에 오래 있다보면 레퍼토리가 늘 비슷하니까 답답하기도 해요. 이런 작업이 리프레쉬도 되고 긴장도 되요. 발레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재밌고요. 그들 움직임을 똑같이 받아서 하는데도 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나오고, 그런 게 재밌어요.





“같이 춤추고 싶었습니다” ‘푸가’는 LG아트센터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공동으로 제작했다. ‘다성음악의 가장 완전한 형식’이라는 바흐의 푸가에 국내 최고 무용수들의 몸짓을 입혔다. 정 안무가는 바흐의 작곡형식과 자신의 안무기법의 유사점을 발견했다. 주제가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되는 가운데 독립된 성부들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구조다. 푸가 형식이 가진 위대함을 춤으로 번역해 내기 위해 음악성이 좋은 발레 무용수들과 새로운 동작에 능한 현대무용수의 앙상블을 구성했다.



정영두 안무가는 발레 무용수들에게 뭘 바랬을까요. 엄: 새로운 라인을 원하신 것 같아요. 가끔 우리한테 발레 동작을 해보라고 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으세요. 그래서 우리가 만든 동작이 중간 중간에 튀어 나오죠. 김: 좀 더 정확한 라인 아닐까요. 발레 무용수들은 모든 동작을 정확하게 찍어가려는 경향이 있잖아요. 이번에 특히나 음악이 보이는 춤을 만들려니 음악 흐름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는 동작에 ‘찍어내는’ 성향이 필요한 거겠죠.



안무에 불만도 많았다던데. 김: 처음엔 제가 몸치였나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제 솔로가 워낙 꼬는 게 많거든요. 자꾸 제 뜻과는 반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솔로에요. 잘하고 싶은데 너무 짜증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여전히 도전하고 있죠. 그런데 재용이는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네요. 순서도 잘 외우고. 엄: 저도 많이 꼬아야 하는데, 그런 걸 워낙 좋아해요. 발레 아닌 춤을 배우는 걸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때는 가수들 댄스도 따라 했었고, 클럽음악이나 힙합도 좋아해요.



발레 무용수들은 놀 때도 춤추고 노나요. 엄: 난리 나죠(웃음). 가끔은 스트레스도 풀어야죠. 김: 발레를 잘해도 몸치인 사람도 있긴 한데, 어쨌든 우리는 음악 듣고 리듬 타는 사람들이니 무슨 춤이든 열심히 춰야죠(웃음).



파드되 때는 클래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던데요. 엄: 일단 돌리는 게 없고요(웃음). 리프트를 하더라도 모던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해야 하죠. 발레는 아라베스크, 폴 드 브라 등 정적인 속에서 들어올린다면, 현대무용은 들어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넘어가야 하거든요. 김: 발레처럼 음악과 동작이 딱딱 떨어지지 않아서 계속 서로 느끼면서 가야 하고요.



윤전일씨와 즉흥 트리오도 있다면서요. 김: 즉흥이라기보다 저희에게 주제만 주고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렇다고 발레를 하는 건 아니고 저희 나름대로 여기서 하던 움직임을 따라해 보면서 동작이 나왔어요. 아마 가장 정영두스럽지 않은 부분이 되겠죠. 엄: 발레 무용수 셋이 즉흥으로 만든 걸 찍어놨다가 좋은 것만 뽑아서 만든 거죠. 우리 요소가 많지만 전혀 발레 같지는 않아요. 음악의 느낌대로 흘러가라고 해서 매번 조금씩 달라지죠. 아마 공연 때도 그럴 것 같아요.



발레처럼 드라마틱하거나 현대무용처럼 파워풀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김: 조금씩 변형되면서 고요하게 올라가는 느낌이 있어요. 조명·의상·세트가 큰 작용을 하니까 무대 올라가면 또 다른 느낌이 있을 것 같고요. 엄: 솔로·듀엣·트리오와 앙상블까지 다양하게 찰랑이며 찬찬히 고조되어 가죠. 14번 곡이 미완성 곡이라 잔잔하게 끝나는데 그런 게 오히려 매력인 것 같아요.





“내 안의 창의력 발견한 계기” 엄재용은 올 초 바흐 음악으로 만든 유니버설발레단의 ‘멀티플리시티’ 공연에 나서지 못했다. 갑작스런 부상 탓이다. 그 아쉬움이 ‘푸가’로 좀 해소됐느냐고 물으니 “전혀 다르지만 이 작품도 못잖게 재미있다”고 했다. “그때는 바흐 역을 맡았었는데 사실 다른 역을 하고 싶었어요. 바흐는 지휘자처럼 중후하게 움직이거든요. 저는 심장이 터지도록 춤추고 싶으니까. 나초 두아토와는 다르지만 정영두 작품도 뚜렷한 개성이 있죠. 여기 와서 정말 많이 배워가요. 혹시라도 제가 안무를 한다면 밑거름이 될 것 같아요. 무용수들과 소통하며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느끼는 게 많거든요.”

‘푸가’ 공연 일정 10월 9~11일 LG아트센터 14일 통영국제음악당 23~24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엄재용이 안무 얘기를 꺼내니 김지영이 눈을 반짝이며 “꼭 해보라”고 부추긴다. 발레 무용수 중에 안무가가 거의 없지만 이제 나올 때가 된 것 같단다. “얼마 전 국립발레단에서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공연을 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실 저도 내년쯤 한번 해볼까 싶었는데 걔네 하는 것 보고 너무 잘해서 접었어요(웃음). 자기 신념이 있어서 어떤 소리를 들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한 사람이 안무를 해야 되는데 저는 마음이 여려서요. 그에 비해 재용이는 속에 불이 있더라고요.”



올 한해 ‘지젤’을 시작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 ‘백조의 호수’ 등 쉼없이 달려온 김지영은 국립발레단의 10월 공연 ‘왕자호동’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올 가을 그의 춤을 만나려면 ‘푸가’를 놓칠 수 없는 이유다. 반면 부상 탓에 상반기 거의 볼 수 없었던 엄재용은 유니버설의 ‘라 바야데르’도 병행중이라 체력소모가 많단다. “오늘도 리허설을 하고 왔어요. 10월 말이 걱정이긴 해요. ‘푸가’ 안산공연이 24일 끝나자마자 ‘라 바야데르’ 무대에 서야 하니까. 다치지 않게 몸관리 잘해야죠.”



무용수로서 이 작품을 통해 발견한 새로운 모습은. 김: 나도 이렇게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움직임의 재발견이랄까요. 동작을 받으면 곧이 곧대로 하는 성격인데 이 작품은 제 걸로 만들지 않으면 해낼 수가 없어요. 느낌대로 움직여 보라고 자유를 주니까. 그러다 보니 내 안의 창의력까지 발견하게 됐어요. 엄: 솔로는 항상 놀듯이 하라고 하시니까, 이렇게 놀면서도 할 수 있구나 싶고요. 김: 재용의 새로운 모습도 볼 수 있을 거에요. 이미지 자체가 왕자인데, 왕자를 떠나 무용수적인 이미지를 발견했달까. 정말 움직임에서 음악이 보이는데, 질투 날 정도에요. 김지영이 치켜세우니 엄재용은 “나도 누나에게 똑같은 걸 느꼈다”며 멋쩍게 뒤통수를 긁는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요. 꼭 내가 하고 싶은 얘길 누가 먼저 하더라고요.”(웃음)



요즘 무용 공연이 많은데 ‘푸가’를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엄: 저희가 나오잖아요. 어디 딴 거 보려구~ (일동 박장대소). 김: 요즘 무용 공연들이 아이디어로 승부를 하는데 ‘푸가’는 춤으로 승부하죠. ‘춤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무대가 될 거에요. 엄: 우리가 나와서 가능한 겁니다(웃음).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na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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