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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틈 야생화 같은 바로크음악의 보석

중앙선데이 2015.10.04 00:45 447호 27면 지면보기

마시티의 ‘6개의 실내소나타 작품 2’ 음반. 그림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라질리에르의 1696년작 ‘성 제네비 에브의 봉헌’에 등장하는 파리 고위관료들.



병원 진료실을 즐겨 가는 사람은 없다. 복도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대기하다 이름이 불리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들어가 작고 동그란 의자에 앉아야 한다. 그곳에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거나 생사간의 선고를 받기도 한다. 대학병원이 특히 심한데, 대개 무표정한 사각 공간에 인체해부도 말고는 그림 따윈 찾아보기 힘들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an die Musik] 미켈레 마시티의 ‘실내 소나타’

얼마 전 이런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의사수필가 김애양 산부인과 원장의 진료실을 방문했는데 사방 벽에 책이 가득했다. 서가에 책을 채워 놓아도 읽었는지 장식에 불과한지는 금세 알 수 있다. 김 원장의 책들은 주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흔적이 역력했다. 마침 환자가 없는 시간이라 책상 위에는 진료기록 대신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집이 펼쳐져 있었다.



진료실을 채운 것은 책뿐이 아니었다. 소박한 오디오에서 바로크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내 집 같은 편안함에 말이 많아져 짧은 취재가 끝나자 김 원장과 허물없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환자도 이런 공간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것 같다. 도서관 같은 공간에 담백한 음악이 시냇물처럼 흐르니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미켈레 마시티



취재 며칠 뒤 김 원장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져 기브스를 한 채 병실에 누워있으며, 음악이 없어서 몹시 불안했는데 누군가 오디오를 갖다 줬고, 마시티 음악을 듣고 비로소 진정이 됐다는 것. 두꺼운 기브스를 감은 채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으나 음악을 듣고 진정됐다는 얘기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는 안도감에다 음악을 공기처럼 호흡해야만 생존 가능한 ‘오디오적 인간’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시티가 누구지?



음반가게를 하는 친구도 모르겠다고 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음악사전에도 흔적이 없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약간의 정보가 실려 있을 뿐이었다. 음반을 검색해 보니 국내에는 딱 한 종류가 수입돼 있었다.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Michele Mascitti, 1663/4~1760)는 이탈리아 중부 빌라 산타 마리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몰연도를 보니 놀랍게도 거의 100년을 살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일생과 완전히 겹치는데, 장수한 편인 바흐보다 20여년 먼저 태어나 10년을 더 살았다.



스승은 나폴리 궁정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친척과 저명한 이탈리아 작곡가 코렐리였다. 미켈레는 바이올린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이탈리아를 한 바퀴 돈 뒤에는 알프스를 넘어 독일과 네덜란드까지 여행했다. 마흔이 되던 1704년에는 파리에 정착하고 이름도 프랑스식의 미셸(Michel)로 바꾼다. 1739년에는 프랑스 국적까지 취득했다. 18세기에 세계의 문화 수도는 파리였다. 독일에서 평생을 보낸 바흐도 작품 제목을 프랑스어로 발표하던 시절이었다. 마시티는 생시에 알비노니, 코렐리와 같이 높은 명성을 누렸고, 그의 작품은 ‘신기한 음악’이라고 칭송받았다고 한다.



배달된 음반에는 여섯 곡의 실내 소나타(6 sonate da camera, Op.2)가 담겨 있다. 작품집의 원래 제목은 ‘바이올린 솔로와 비올리네, 쳄발로를 위한 15개의 실내소나타’로 되어 있는데, 여섯 곡을 추리고 바소 콘티누오는 첼로 혼자서 담당했다. 건반악기를 빼버린 것은 두 대의 선율악기만으로 좀 더 간결하게 악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첫 악장에 아다지오, 라르고 등 느린 음악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 양식으로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승 코렐리가 즐겨 쓰던 양식이었다. 바흐의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BWV 1014~1019)’도 교회 소나타 양식을 채용해 첫 악장들이 느리게 시작한다. 아내를 잃은 슬픈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바흐는 독일 구석진 곳에 앉아서도 음악 선진국 이탈리아의 최신 경향을 꿰뚫고 있었다.



음반을 밀어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바로크 바이올린이 공간을 서늘하게 가른다. 문득 파란 하늘이 떠오른다. 맑고 슬픈 색 블루. 소리는 가늘지만 신경질적이지는 않다. 첼로도 무겁지 않다. 바이올린의 사뿐한 걸음을 한 발 뒤에서 받쳐준다. 상쾌하고 우아한 동반이다. 금세 빠른 악장으로 넘어간다. 달리지만 가볍지는 않다. 이탈리아풍 프랑스 음악이라고 할까. 김 원장은 ‘바흐보다 살짝 화려한 음악’이라고 했다.



녹음은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의 16세기에 건축한 작은 교회에서 했다. 공간감이 적절하고 잔향이 지나치지 않아서 좋다. 현과 활의 날 선 마찰음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연주자는 모두 이탈리아인이다. 바이올린의 파브리치오 치프리아니와 첼로의 안토니오 판티누올리는 오이로파 갈란테 등 최고의 음악가들과 활동한 명인들이다. 이들은 선배 마시티의 악보로만 전해지는 작품집(Op2)을 최초로 레코딩해 세상에 알렸다.



우연히 알게 된 마시티의 음악은 계곡 바위틈에 핀 야생화 같은 작품이다. 김 원장은 산길을 오가며 홀로 은밀히 감상하던 꽃을 무심결에 알려주었다. 병상에 묶여 신음하던 환자를 즉시 안정시킨 마약 같은 곡이니 진통제가 필요 없겠다. 김 원장은 ‘의사들은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최정동 기자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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