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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버리고 문장을 벼린 김훈

중앙선데이 2015.10.04 00:21 447호 32면 지면보기

지은이: 김훈 출판사: 문학동네 가격: 1만5000원



“독자는 김훈을 신경 쓴다.”


『라면을 끓이며』

계간 『문학인』 2002년 가을호에 실렸던 어느 인터뷰에서 읽은 말이다. 소설가 김훈의 글을 한 번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그의 칼날처럼 건조한 문장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김훈 스스로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라고 말한 바로 그 글쓰기다.



김훈은 “이런 문장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읽었다”고 했다. “군소리가 없고, 무인들이 큰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사태를 정리해버리듯 이 한 번으로 끝내버리는 문장을 이순신은 쓰고 있더군요. 그것은 아무런 재미가 없는 문장입니다. 아무런 수사적 장치가 없는 문장. 그러나 나한테 그것은 놀라운 문장이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훈은 이순신의 문장에 놀랐다지만 독자들은 김훈의 책이 나올 때마다 번번이 놀란다. 그러니 그의 새로운 책이 또 한 권 출간됐다는 소식에 신경 쓰일 수밖에.



『라면을 끓이며』는 김훈의 새 산문집이다. ‘김훈 세설(世說)’이라는 부제가 붙었던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바다의 기별』에서 시대를 초월해 기억할 만한 산문들을 가려 뽑고, 이후 새로 쓴 산문 원고 400매 가량을 합쳐 엮었다.



2015년 1월 1일 중앙일보에 실린 글과 같은 해 4월 10일 종합경제지 이투데이에 실린 글을 합쳐서 재구성한 ‘세월호’, 2012년 초가을부터 2013년 봄까지 8개월 동안 경북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바닷가 마을에 머물며 적은 ‘바다’, 2015년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여러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중앙일보가 주최한 ‘평화 오디세이 2015’ 행사에 참가해 썼던 ‘국경’ 등이 새로 쓴 산문이다.



책의 표제글이 된 ‘라면을 끓이며’ 역시 새로 합쳐진 것으로 ‘매해 36억 개, 1인당 74.1개(세계 인스턴트 라면협회 2013년 통계)’를 먹는 평범한 한국인들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한 이야기다. 김훈은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힌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고 썼다.



오래 전에 절판돼 지금은 중고서점을 뒤져야만 찾을 수 있는 옛 산문집을 혹여 갖고 있더라도 먼젓번 글을 찾아내 짝 맞추기는 쉽지 않다. 밥·돈·몸·길·글의 5개 주제로 구성된 책 속에 골고루 흩어져 있는 데다 김훈의 문체처럼 제목이 간명하게 바뀐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명의 개별성(『바다의 기별』)’은 ‘목숨2’로, ‘양희은, 김추자, 심수봉(『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은 ‘여자7’로, ‘아날로그적인 삶의 기쁨(『밥벌이의 지겨움』)’은 ‘손1’로 제목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마지막 남은 옷까지 모두 벗어버린 듯한 제목 안에서 칼날처럼 단순하면서도 명석한 김훈의 문장은 변함이 없다.



김훈은 이 책을 엮는 과정에서 많은 글들을 버리고, 새로이 문장을 벼렸다고 했다. 책 서두에는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은 모두 버린다”고 적었다. 계간 『문학인』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훈이 했던 말이 또 생각난다. “나는 글을 쓸 때 어떤 전압에 끌린다. 전압이 높은 문장이 좋다. 전압을 얻으려면 상당히 많은 축적이 필요하다. 또 그만큼 버려야 한다. 버리는 과정에서 전압이 발생한다. 안 버리면 전압이 생길 수 없다.”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 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진 이 짧은 문장에서조차 조사 ‘이’와 ‘은’, 한 글자를 고심끝에 구별해서 넣는 것이 김훈의 문장이다. 그가 시간을 축적해 무엇을 가차 없이 버리고, 또 어떤 전압을 발생시켰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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