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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말

중앙선데이 2015.10.04 00:12 447호 34면 지면보기
아버지,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물론 태어날 때는 관심과 기대를 받았겠지요. 그것이 사랑이었을까요? 그저 제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저를 가르쳤습니다. 조기교육이었지요. 아버지 시절과 비교하면 저는 좋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교복인 청금을 입고 연두건을 쓰고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되었지요. 감사한 일입니다만 공부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했고 가끔 아들이 이룬 작은 성취를 칭찬하기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한 점을 개탄했으니까요.



아버지, 제가 머물던 저승전 후문인 융효문 바깥에는 군물고가 있잖아요. 무기들을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었어요. 손재주 좋은 한상궁이 종이나 나무로 칼과 활을 만들어주고 무예도 가르쳐 주었지요. 어느 날 마당에서 어린 나인들과 장난감 칼을 갖고 노는 저를 보고 물었지요. 그래 공부는 다 하고 노는 것이냐? 저는 네 라고 대답하였지만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찼습니다. 공부에 끝이 없거늘 어찌 그리 가볍게 말하느냐. 아버지가 그러실수록 저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책만 펴면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지금처럼요.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아버지는 참 검소한 분이지요. 침전에는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가 전부였고 잡곡밥과 거친 소찬을 즐기고 항상 소식하였으니까요. 아버지와 달리 저는 식탐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아끼시어 맛난 음식이 있으면 항상 챙겨 주셨는데 이 뒤주 속에 있으니 그 음식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네요. 아버지는 제가 항상 많이 먹는다고 못마땅해하였지요. 많이 먹었으니 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제 배를 두고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놀리셨지요. 이 아이의 배를 한번 보시오. 지난번 가마 탈 때 보니까 가마가 좁아서 타지 못하더군요. 내가 서른 살 무렵까지 타던 가마였는데 이제 겨우 열두 살 아이가 말이오.



아버지는 눈물의 임금입니다. 자주 우셨지요. 곡식 낟알 하나하나가 모두 일하는 이의 고생 속에서 생산되며 실 한올한올이 가난한 여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잔인하지 않겠는가 하며 백성을 걱정하고 민간의 고통을 가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자식의 고통 앞에서는 이처럼 냉정한 것입니까?



아버지는 제 옷차림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했습니다. 살이 있으니 아무래도 옷이 잘 안 맞았겠지요. 단정하게 입어도 어딘지 반듯하지 못해 보였겠지요. 그러면 그것을 두고 또 비난했습니다. 점점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옷을 입을 때면 예민해져서 몇 번이나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아버지, 왜 하필이면 뒤주인가요? 형벌은 반드시 죄목과 연동되니까, 목을 베거나 사지를 찢거나 사약을 내리면 그것이 역모죄의 형벌이니까, 저의 역모죄를 피해야 제 아들에게 ‘역적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어느 법전에도 없는 형벌로 죽이려 한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관에 가둬 죽여도 되잖아요. 이게 뭐에요.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이 거구의 몸을 비좁은 뒤주 속에 어떻게 넣어요. 못 먹는 건 참는다 쳐요. 똥 오줌은 어떻게 해요? 일국의 왕자인데,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장인데, 문명인인데. 이 윤 5월 무더운 여름 날씨에. 이런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이거 다 쇼죠? 한 며칠 가둬두면 중신들이며 종친들이 간청할 테니 그때 못이기는 척하고 풀어주려는 거죠? 제발 그러지 마요. 이런 전시행정, 정치쇼 이제 식상해요.



자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나요. 경전을 읽는 것보다 시 짓고 그림 그리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먹는 것을 좋아해서 뚱뚱해진 자식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나요.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모습을 내 틀에 맞추고자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감정기복도, 콤플렉스도, 식성과 기호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째서 저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아버지의 기대와 욕심에 가두려 하셨나요? 제 기질과 식성과 재능을 아버지의 뒤주 속에 가두려 하셨습니까?



아버지, 나 뒤주 속에 있어요. 벌써 칠일째라니까. 아버지, 나 잊으면 안 돼.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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