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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카툰캠퍼스가 함께하는 역사통(通) 기자단

온라인 중앙일보 2015.10.0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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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 기자단 따라잡기] 창덕궁 ③ 1910년 8월 29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한제국

인정문 → 희정당 | 효종·숙종·영조·고종 등의 즉위식이 거행됐던 인정문을 지나면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이 나온다. 여느 궁과 다름없이 박석이 넓게 깔렸고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품계석은 인정전을 중심으로 동반(동쪽)과 서반(서쪽)으로 나뉘는데, 동반은 문관 서반은 무관 자리였다. 조선시대 신분을 나타내던 ‘양반’이란 동·서반을 합쳐 부른 말이기도 하다.

조정을 지나 인정전 내부를 살펴봤다. 조선 궁궐의 정전에는 공통으로 어단(왕의 의자를 놓는 단상)과 어좌(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폭포·파도·소나무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이 둘러 있는데 인정전에선 그 모습이 영 어색해 보였다. 1907년 11월 창덕궁으로 이어한 순종황제는 이렇다 할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한 채, 즉위 4년 만인 1910년 8월 29일 인정전에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제에 준다는 한일병합조약을 공표하고 만다. 이로써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품은 대한제국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일제는 인정전에 일본식 마루를 깔고 댄스 홀로 사용했다.

가슴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청색 기와지붕이 눈에 띄는 곳으로 갔다. 왕이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인 선정전이다. 중동지역의 염료를 수입해 염색한 청기와가 얹힌 곳은 왕명이 나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았는데, 현재는 창덕궁에서만 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태조 때부터 정치·외교·군사는 물론이고 풍속·미술·종교까지 여러방면에서 충실히 사실을 기록해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은 왕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실록을 담당하는 사관들은 독립적인 부서로 인정받아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서 기록을 남겼다. 왕들은 종종 사사로운 것까지 기록하는 사관을 얼마나 귀찮아 했는지 태종이 사관 몰래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첫 마디가 “이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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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 소감 최한영 역사통 기자단 1기 |
“희정당의 이름은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때 희정당으로 바꿨다고 해요. 지금의 희정당은 1920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돼 있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인 화장실이 설치돼 있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모
습을 보는 것 같아요.”


글=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동행취재=역사통 기자단 1기(분당 장안초)
사진=우상조 기자 woo.sangjo@joongang.co.kr·중앙포토, 해설=최연섬 문화유산국민신탁 활동가, 진행=황정옥·이민정 기자, 권소진 인턴기자, 나성진 문화유산국민신탁 연구원, 강철웅(한국전통문화대 4)·이민희(경인교대 1)·이수인(경희대 4) 대학생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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