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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⑫

중앙선데이 2015.10.04 00:03 447호 1면 지면보기
중일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주가는 폭락했고, 1939년의 큰 가뭄으로 일본 서부와 한국·대만의 쌀 수확마저 줄어들었다. 본토 일본인들의 불만이 높아가자 일제는 식민지 백성들을 쥐어짜서 불만을 달래야 했다. 1939년 11월의 곡식 강제매입제도, 즉 공출(供出)이 그것이다. 공출이란 곡식 등의 생필품을 총독부에서 강제로 헐값에 매입해 일본으로 보내는 제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탈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은 공출까지 겹쳐서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식민지 백성들을 압박하는 것은 공출뿐이 아니었다. 일본 본토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하는 판국이니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제는 1941년 2월 제령 제8호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반포했는데, 이는 ‘악법 위의 악법’이었다. ‘악법도 법이다’란 말 속에는 악법이라도 지키기만 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예방 구금은 아무런 법 위반을 하지 않았어도 마음대로 잡아가둘 수 있다는 희한한 법이었다. 예방구금은 검사의 청구에 따라 재판소 합의부가 결정한다지만 재판소는 허울 뿐이고 검사가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8일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악(改惡)했는데 과거 “국체를 변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함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정(情)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조항에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를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상향시켰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12- 병영으로 변한 한?일

1935년 5월 이회영의 아들 이규호(李圭虎:이규창)는 엄순봉(嚴舜奉:엄형순, 일제에 사형당함)과 함께 상해의 친일파인 조선거류민회 부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다가 국내로 끌려와 종로서 고등계 사이가(齊賀)에게 취조를 당했다. “나를 보고 ‘국어(國語)’할 줄 아느냐고 묻기에 안다고 하니 해보라고 하기에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우리나라 국어가 아니고 또 따로 무슨 국어가 있느냐고 반문하니 사이가가 발끈 화를 내면서 ‘바가야로’를 연발하며 피우던 담배를 수갑 찬 내 손등에 지졌는데 내 손등이 담뱃불로 지글지글 타서 참으로 참기가 어려웠다…사이가는 ‘너는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이구나’…(『운명의 여진』).” 한국어 말살정책을 펴기 전인 1935년부터 벌써 한국어를 말하면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황도파(皇道派) 파시스트였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패전 후 A급 전범)가 식민지 한국을 병영(兵營)으로 만드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도쿄제대 법대 출신의 시오바라는 1918~21년 일본 내의 민주화운동인 ‘대정(大正) 데모크라시’에 맞서 ‘흥국(興國)동지회’를 결성했던 극우 파시스트였다. 미나미는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모사꾼이 ‘반도의 히틀러’로 불렸던 시오바라였다. 미나미는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0월 2일 경성발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제정했다. 총독부 학무국 촉탁이었던 이각종(李覺鍾) 같은 친일파도 이 서사 작성에 관여했는데, 아동용과 성인용 두 종류가 있었다. 모든 학교와 관공서는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매일 아침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면서 일왕이 있는 동쪽 일본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받았다. 또 한국의 모든 촌락에 한 개 이상의 신사(神社)를 세우겠다는 ‘1면(面:촌) 1신사(神社)’ 운동도 함께 추진되었다.



1937년부터 모든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한인들은 일본어만 상용해야 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은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고, 1943년 4월에 개정된 제4차 조선교육령에는 조선어 과목 자체를 삭제했다. 전국 각지에 국어(國語:일본어) 강습소가 개설되고, 국어교본(國語敎本)이 배포되었다. 관청에 진정서를 쓸 때 일본어로 쓰지 않으면 접수 자체를 해주지 않았다.



한국의 병영화(兵營化)는 거꾸로 일본 본토로 파급되었다. 일본 본토의 병영화는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면서 강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중일전쟁 때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은 일왕 히로히토에게 ‘사변(事變)은 두 달이면 끝난다’고 상주했지만 자기도취에 불과했다. 일본 군부의 나팔수가 된 언론들은 연일 승전보를 전했지만 일본의 자본, 즉 돈은 본능적으로 일본 군부의 실력을 알아차렸다. 중일전쟁 장기화에 초조해진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가 스기야마 육군대신과 손잡고 만든 것이 1938년 4월의 ‘국민총동원법(國民總動員法)’이었다. 국민총동원법은 일본 국민들을 군부의 노예로 만드는 전 국토의 병영화 법령이었다. 국민총동원법이 공포되자 주가는 다시 대폭락했다. 그중에서 주식시장에 가장 민감했던 조항은 제11조였다. 이 조항은 두 가지 내용이었는데 하나는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이익 부분의 처분에 대해서도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융기관에 대해 강제로 대출이나 채무인수 등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일본 경제를 자본(資本)의 논리가 아니라 군부(軍部)의 논리대로 통제하겠다는 법이었다. 조선을 먼저 병영화해서 일본 본토에 수출했던 미나미는 국민총동원법이 제정되자 더욱 조선을 옥죄었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는 메이지 헌법을 적용하지 않았음에도 국민총동원법 같은 악법은 식민지에도 동시에 적용했다.



미나미는 내친김에 창씨(創氏)개명까지 밀어붙였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제령(制令)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서 한국 고유의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창씨개명의 골자는 한 자로 되어 있는 성(姓)을 일본처럼 두 자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미나미는 ‘조선인의 뜨거운 여망’에 의한다고 주장했고 겉으로는 “씨(氏)는 호주(戶主)가 이를 정함”이라고 해서 자발적인 것처럼 호도했지만 사실은 강제 그 자체였다. 1940년 2월에 이를 시행하면서 동년 8월까지 ‘씨(氏)’를 결정해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비국민(非國民)’ 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서 경찰 수장(手帳)에 기입해서 사찰하고, 징용 때 우선하거나 식량 배급에서 제외했다. 또한 자녀들의 각급 학교 진학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성(姓)을 갈겠다’는 게 최대의 욕이었던 한국에서 성을 바꾸는 것은 아무리 군사력에 의지한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시 첫 달인 1940년 2월 호적총수 428만2754호 중 0.36%인 1만5746호만 개명했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행정관서와 경찰 등의 공조직과 중?일전쟁 1주년에 만들어진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같은 친일 사조직을 동원해 개명을 독려해서 8월까지 320만116호를 달성했다. 호적총수의 무려 79%였다.



창씨개명은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광수는 1940년 2월 20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창씨와 나’라는 글에서 ‘향산광랑(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臣民)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라면서 성은 물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토 지코(伊東致昊)로 성만 바꾸었고, 김활란(金活蘭)은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이라는 종교적 색채의 성씨로 바꿨다. 고육책도 잇따랐다. 전(田)씨나 전(全)씨 등은 조선왕조의 탄압을 피해서 성에 왕(王)자의 흔적을 남긴 고려 왕씨의 후예들이 많았는데, 전규헌(全圭憲)은 고려에서 고(高)자를 따고 고려 수도 송도(松都)에서 송(松)자를 따서 후루마쓰(古松)라고 개명했고, 백낙준(白樂濬)도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으로 백(白)씨의 흔적은 남겼다.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 등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요시야마(佳山)라고 최(崔)씨를 파자(破字)한 경우도 있었다. 전남 곡성의 유건영(柳健永)은 “슬프다, 유건영은 천년고족(千年古族)이다…나라가 멸망했을 때 죽지도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아왔지만…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 전북 고창의 설진영(薛鎭永)은 아이의 교사가 진급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해 아이가 울며 보채자 창씨개명 뒤 다음날에 자결했다. 성을 바꾸었으니 견자(犬子:개새끼)라고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312호 2013년 3월 3일, 제309호 2013년 2월 10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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