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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노무현 만난 김정일 “DJ와 낸 6·15선언은 빈 선전갑”

중앙일보 2015.10.01 02:52 종합 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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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차 남북 정상회담 사흘째인 2007년 10월 4일 오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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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작별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 중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7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6·15 남북 공동선언(2000년)을 “빈 종이”라고 말한 사실이 공개됐다.

노, 평화협정 문제 거론하자
김 “미국과 해결할 사항” 거부

노 “부시 대통령도 노력” 설득
“종전선언 추진 협력”에 합의

해주특구 설치 반대하던 김
점심 뒤엔 “장성들이 괜찮단다”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이 함께 쓴 남북 정상회담 회고록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10·4 남북정상선언』에서다. 책에 따르면 김정일은 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2000년 6·15 공동선언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 제기하는 모든 문제, 또 우리가 합의 본 이 문제를 놓고 다시 문서화해서 내면 이게 또 빈 종이짝이 되지 않겠는가(하니),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좋은 거 하나 내자고 자꾸 독촉을 해서 6·15 공동선언, 쌍방이 힘들게 완성을 시켜… (하지만) 6·15공동선언 5년 동안의 역사 시간을 보면 그저 상징화된 빈 구호가 되고, 빈 종이, 빈 선전갑(甲·북한어로 ‘껍데기’라는 뜻)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6·15 선언 이후 추가 경제협력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것을 에둘러 표한 것이다. 김 전 원장 등은 “북측은 우선 상호 경협 문제를 중점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짧은 정상회담 기간 동안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중점을 두면 오히려 회담 진전에 장애가 조성될 것을 우려한 것 같다”고 적었다.

 회고록은 종전 선언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문제도 담았다. 평화협정 이슈는 노 대통령이 꺼냈다. 김정일은 당초 “(평화협정은 남북이 아닌) 북·미 간 해결 사항”임을 고집하며 대화에서 배제하려 했다.

노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평화협정 체결 등 북·미 관계 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고, 그제야 김정일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선언문에)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종전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표현을 넣는 것으로 합의하자”고 했다. 김 전 원장 등은 회고록에서 “북한이 ‘3자 또는 4자 정상’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고집한 것은 한·중 수교 이후 북·중 간의 갈등을 감안한 것인 동시에 향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시 중국의 참여 여부를 대중국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책에는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뒀던 해주와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제5항의 3)에 관한 비사도 담겨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구상을 별도 조항으로 제안하면서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관련 조항(제3항)에도 중복해 포함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김정일은 오전엔 이 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특히 남측이 제안한 해주 특구 설치 문제에 대해 “새로운 공단 하는 건 찬성할 수 없다… 해주는 개미도 들어가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집중된 곳인데… 지금은 군대가 우선 반대할 테고”라고 주장했다.

 오후 노 전 대통령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구상이 분쟁을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며, 인천·해주·개성을 연결해 동북아 물류 중심기지로 육성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했다고 회고록은 설명했다. 김정일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는 “점심 이후 군 장성들을 오라 해서 (해주항을 이용하게 해주려던) 1999년의 결심을 되살리려면 어떤 문제가 있겠냐 하니까, ‘문제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전수진·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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