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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옥·용익아! 어떻게 살았니 죽기 전에 우리 꼭 만나자”

중앙선데이 2015.09.26 08:57 446호 4면 지면보기

이소녀



“용옥아, 용익아!” 동생들을 부르는(82·) 할머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카메라 렌즈 너머에 어린 동생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같이 남으로 내려오지 못한 미안함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교차했다. “꼭 만나자. 우리 꼭 만나자.” 할머니의 절절한 음성에 촬영팀도 숙연해졌다.


1·4 후퇴 때 두 동생과 이별한 이소녀 할머니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이 고향인 이 할머니는 17세 나이에 시집을 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된 이른바 1·4 후퇴 때 남편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인민군 징집 대상이었던 남편 때문에 서둘러 피란을 떠난 것이다. 그 와중에 친정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동생들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 속을 지나면서 친정집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했다.



“한 1주일이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 할머니는 그때 고향땅을 다시는 밟지 못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대동강 이남으로는 아무것도 없어서 살 것,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부산이었다”고 회상했다. 평양에 살던 친정 오빠들은 이미 피란을 떠난 상황이었다. 먼저 피란한 오빠들은 남쪽 어디에 있겠거니 했지만, 피란했는지 여부도 모르는 동생들 걱정에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1983년 여느 이산가족들이 그랬듯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통해 가족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벽면에 대자보가 빼곡히 붙은 여의도 KBS 방송국을 찾아 며칠 밤이고 오빠와 동생들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포기해야만 했다.



이 할머니는 피란민들의 죽음을 생생히 목격했다. 황해도 해주에 몰린 피란민들이 남쪽으로 가는 배를 구하지 못한 채 폭격에 희생당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혹여나 동생들도 난리통에 변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이 할머니에게는 무엇보다 동생들의 생사확인이 절실하다.



이 할머니는 전쟁 직전 시집간 탓에 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가져오지 못했다.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동생들을 할머니는 애절하게 불렀다. “동생들아, 어떻게 살았느냐. 너희들 한 번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너희들도 거기서 다 잘살고 있을 거라 믿으니까 우리 꼭 만나자. 보고 싶다.” 촬영을 마친 후 이 할머니는 북쪽으로 난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연신 눈가를 훔쳤다.



 



 



하준호 인턴기자 jdoldol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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