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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추석 '오세니니' 가을을 맞는 날 … 러 거주 고려인들에겐 가장 중요한 명절

중앙일보 2015.09.25 00:02 부동산 및 광고특집 8면 지면보기
보름달처럼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기원합니다!

한복 입고 부모님 찾아
가족끼리 음식 나눠
빵 찢어 가축에 나눠주는
러 전통 풍습 없어졌지만
장터 등 열고 산책 즐겨

알다시피 해마다 한국의 일상은 최소 3일은 멈춘다. 서양의 추수감사절 격인 추석을 맞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추석, 추수감사절이 그렇게 큰 명절은 아니지만 나름 특색이 있다. Russia포커스가 ‘러시아의 추석’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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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ussia포커스. 러시아에서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며 추수감자절로 기념한다. 이날은 수확을 즐기는 느낌으로 가득하다.]


러시아식 추석=러시아에서는 추수감사절을 ‘오세니니(Осенины, ‘가을을 맞는 날’이라는 뜻)’라 한다. 9월 21일에 쇤다. 발렌티나(89)는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 “젊었을 때 시베리아의 시골들을 돌아다니며 민속자료를 수집했는데 거기서 추수감사절 의식을 보게 됐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그런 풍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생생했다”며 이렇게 소개했다.

"그날 이른 아침에 여자들이 귀리빵과 키셀(걸쭉한 러시아 전통음료)로 ‘오세니나(Осенина) 엄마’를 맞으러 호숫가와 연못가로 나간다. 여성 가운데 제일 연장자가 빵을 들고 서면 젊은 여성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민요를 부른다. 그 다음 빵을 사람 수대로 잘게 찢은 후 가축에게 먹인다.”

같은 날 러시아에서는 성모 탄신일을 맞는다. 이 명절의 이교도적 기원은 기독교 풍습과 단단히 얽혀 있다. 민요와 찬송가를 부르는 의식 동안 여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문을 왼다. “정결하신 성모마리아여, 궂은 일과 힘든 일을 면하게 하시고, 다른 이들을 피하게 하시고, 나의 삶을 비추옵소서!”

물론 현재 러시아에서 추수감사절은 한국에서도 그렇듯 상황에 맞게 ‘조절’된다. 호숫가에 나가 빵을 찢는 의식은 민족축제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추분기 대도시에서는 ‘농민’ 장터가 열리는데, 특히 꿀 장터가 인기 있다. 이 기간에는 꿀을 수확하면서 꿀벌도 양봉장에서 쫓아내기 때문이다(11월 초 쯤 되면 꿀벌은 다 겨울 집으로 옮긴다는 의미).

요즘 모스크바 광장(주요 광장인 붉은 광장 및 마네시 광장 포함)을 가면 이미 9월 초순부터 등장한 즐거운 천막시장이 있다. 오두막들은 커다란 호박, 포도덩굴, 짚, 그리고 오이와 토마토에서 꿀과 검은 캐비어에 이르는 가지각색의 농수산물로 장식됐다. 2~3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서 볼 수 없던 광경이다. “서방의 경제제재가 도움이 된 것 같다”고 알렉산드르(34)는 농담한다. “이 장터의 물건들은 수퍼마켓보다 조금 비싸지만, 대신 식재료가 신선하고 향긋하다. 나는 아내와 자주 우리 지역 장터를 돌아다닌다.”

러시아에서 추수감사절은 가을이 멈추고 며칠 동안 갑자기 따뜻하고 맑은 날씨가 돌아오는 시기인 ‘인디언 서머’와 자주 겹친다. 그래서 이날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공원과 소공원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아이들이 가장 즐거워한다. “꺅꺅”하면서 떨어지는 황금색 나뭇잎 속에서 깡충깡충 뛴다. 아이들이 귀엽게 뛰어노는 동안 어른들은 녹색의 외투를 절반쯤 벗은 공원의 오솔길들을 사색에 잠겨 천천히 걸으며 도시의 삶에서 거둔 수확을 음미한다. 지난 여름을 결산하고 앞날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들은 어떻게 추석을 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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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ussia포커스. 한민족인 고려인은 단아한 한복을 입고 추석을 쇤다. 쇠는 명절과 즐기는 명절에 담긴 민족의 전통은 이렇게 다르다.]


모스크바 고려인의 추석=옛소련 지역에는 현재 약 50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약 3분의 1이 러시아에 산다. 고려인은 혈통적으로 한국인이지만 소수만 한국어를 알고 제대로 김치를 담그거나 된장찌개를 끓일 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석은 여전히 고려인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우리는 항상 추석을 쇤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생 이리나(23)가 말한다. “지금 다른 도시에 사시는 부모님 댁에 간다. 남동생도 모스크바에서 온다. 부모님은 조부모님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신다. 우리는 조부모님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즈베키스탄에 사셨고 아주 어렸을 때만 뵈었는데 돌아가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명절 식탁이다. 엄마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상을 차린다. 마치 새해 명절처럼. 사실 우리 집 음식은 전혀 한국음식이 아니다. 당근김치와 간장 정도뿐이다.”

많은 고려인이 이리나의 가족처럼 친척들과 모이지만, 대부분은 고려인들의 명절 행사에 참가한다. 올해에는 모스크바의 추석맞이가 9월 21일 월요일에 시작됐다. 노바야 바스만나야 거리에 있는 ‘모스크바 민족의 집’에 구소련 방방곡곡에서 온 고려인들이 모였다. 이날은 ‘폴랴르나야 즈베즈다(북극성)’ 집단농장의 전설적인 지도자 김병화의 탄생 1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김병화 기념 사진전과 함께 한국 문화와 추석에 관련된 전시회도 열렸다.

‘민족의 집’을 21일 찾았다. 긴 복도들마다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여성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다. 첫눈에 보기에는 평범한 한국 아줌마. 그러나 그들의 얼굴과 시선에는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러시아적인 무엇이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나르고 있고, 다른 사람은 장미 꽃봉오리 모양으로 조각한 수박을 손에 들고 있다. “나에게는 이런 만남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박을 든 여성이 말한다. “이곳에서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기 어렵다. 말도, 전통도 모른다. 수년간 내 뿌리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모든 고려인이 사는 곳과 하는 일에 관계 없이 함께 추석을 맞는 것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엘레나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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