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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패 일본 배드민턴, 그 뒤엔 박주봉 있었다

중앙일보 2015.09.24 00:50 종합 2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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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봉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감독(왼쪽)은 지난 2004년 지휘봉을 잡은 이후 일본을 아시아 정상권에 올려놓았다. 일본 배드민턴계는 박 감독을 ‘가미사마(신)’라 부르며 존경심을 표현한다. 지난해 5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 배드민턴 남자단체선수권 우승 직후 환호하는 일본대표팀. [뉴델리 AP=뉴시스]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이다. 최근 세 차례 여름올림픽에서 10위권 이내에 꼬박꼬박 이름을 올렸다. 월드컵 축구 본선 무대도 연속으로 8차례나 밟았다.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79개를 따내 일본(49개)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중국(151개)에 이어 2위를 지켰다.

영욕의 한·일전 반세기 <하> 이젠 공존의 시대로
일본, 11년간 감독 맡기며 신뢰
지난해 세계선수권 우승 이뤄
한국, 극일 압박에 엘리트 교육만
스포츠 저변 확대 실패 등 부작용
프로야구, 일본 코치 영입 실력 향상
인적 교류 늘려 양국 장점 나눠야


 하지만 대한민국은 ‘스포츠 선진국’은 아니다. 화려한 국제대회 성적과 달리 저변이 취약하다. 오랜 기간 ‘국가를 위한 소수, 소수를 위한 스포츠’를 지향한 결과다. 재능이 뛰어난 몇몇 엘리트 선수에게 자금과 인프라를 집중 투자하는 독특한 시스템 아래서 따낸 올림픽 금메달은 해당 종목의 대중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엘리트 시스템의 저변에는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으로 평가하는 구시대적 ‘한·일전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며 거액의 보상금과 차관을 받아 경제를 일으켰다. 3억달러의 청구권 자금(무상지원금) 중 절반 이상을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설립 등 제조업에 쏟아부었고, 20%는 고속도로와 항만·댐 등 기초 인프라 구축에 투자했다.

 ◆책임감과 불안감이 교차했던 한·일전=‘일본이 준 돈’ 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던 국민들의 비애를 스포츠 한·일전 승리의 쾌감이 상쇄해줬다. 특별한 각오로 나선 우리 선수들은 능력 이상의 결과를 내며 빠르게 경쟁력을 키웠다. 1970년대 일본 선수와의 맞대결에서 연전연승한 복서 유제두, ‘개구리 번트’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을 이끈 김재박, 축구 한·일전에서 6골(통산 1위)을 넣은 차범근 등 ‘국민 영웅’도 줄줄이 탄생했다. 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한·일전에 나설 땐 눈 앞에 선 일본 선수들보다 등 뒤에 있는 관중들이 더 신경쓰였다. ‘시원한 승리로 국민들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늘 교차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축구는 1983년 아시아 최초로 프로리그 시스템을 도입해 일본에 건강한 자극을 줬다. 일본은 10년 뒤인 1993년 J리그를 만들었다.

 이제 한·일전에 대한 국민 정서는 예전 같지 않다. 한국이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며 ‘극일’의 효용이 크게 줄었다. 체육철학자 김정효 박사(서울대 강사)는 “일본 체육계는 한·일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승부에 집착해 결과만 좋으면 과정의 잘못을 묻지 않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꾸준히 경쟁력을 유지할 시스템을 갖추려고 노력했다”면서 “우리나라는 최근 들어 비로소 가슴(감성) 대신 머리(이성)로 경기를 읽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한·일전의 가치를 높일 방안으로 ‘시스템 교류’를 꼽았다.

 김 박사는 “우리 스포츠가 구타·횡령·승부조작 등 구시대적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여전히 스포츠가 ‘소수의 전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며 “일본 스포츠의 핵심 키워드인 ‘sports for all(모두를 위한 스포츠)’의 장점을 받아들여 저변 확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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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에 세밀한 일본야구를 심어주고 있는 나카무라 다케시 KIA 배터리코치. [사진 KIA 타이거즈]

 ◆일본이 한국 돕고, 한국도 일본 돕고=한·일 스포츠 공존과 상생을 위한 또 하나의 화두는 ‘인적 교류 확대’다. KBO리그는 수준 높은 일본 야구의 지도자를 데려와 경기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나카무라 다케시(48) KIA 타이거즈 배터리코치가 대표적이다. 현역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 소속으로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8차례나 출전했던 명포수 출신이다. 요코하마·주니치·지바롯데 배터리코치를 거쳐 지난해 말부터 KIA 포수들을 맡아 엄격하면서도 합리적인 지도를 하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출전한 축구대표팀은 J리그의 체력훈련 담당 이케다 세이고(55) 코치를 영입해 사상 첫 동메달의 기초를 닦았다.

 반대 사례도 있다. 과거 한·일전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일본 배드민턴은 지난 2004년 한국 배드민턴의 전설 박주봉(51) 감독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고, 10년 만에 아시아 정상권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5월에는 세계남자단체선수권 정상에 올랐다. 박 감독은 “내가 처음 태극마크를 단 1980년에는 일본이 한국을 압도했다. 당시 일본인 코치님께 배운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이제 내가 일본 선수들을 가르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황선홍·홍명보·유상철·박지성으로 대표되는 한국인 J리거들은 수준 높은 경기력 이외에 일본 축구가 갖지 못한 투지와 체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체육사학자 손환 중앙대 교수는 “박주봉 감독은 1990년대였다면 ‘매국노’로 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 배드민턴계도 박 감독을 ‘건전한 자극제’로 여긴다”면서 “한·일 양국이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장점을 주고 받는 게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은 “최근 들어 중국이 축구에 적극 투자하면서 한국(전통과 경기력)-중국(자본)-일본(시스템)의 프로축구리그가 저마다 특색을 갖췄다. 한·중·일 삼국으로 교류의 폭을 확대하는 것도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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