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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양김과 다른 길 … 근대화 기반 위에 민주국가 꽃피우려 했다”

JP “양김과 다른 길 … 근대화 기반 위에 민주국가 꽃피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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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 전 총리는 1987년 대선 80일을 남겨 놓고 9월 2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JP가 이튿날인 9월 29일 고향 충남 부여군 백마강변 구드레 광장에서 열린 정계복귀 환영대회에 참석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모습. 이날 행사에는 충남 도민 등 10만여 명이 운집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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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는 캔버스와 같다.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칠하듯 시대는 그려가는 것이다. 1980년에 맞이한 ‘서울의 봄’에 우리 국민은 불안 속에서도 자유와 민주의 새시대 그림을 그려가고자 했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86> 정치인생 2막을 열다
‘박정희 7주기 추도식’ 추진한 JP
장세동 안기부장이 안가로 불러
“그걸 하면 어려운 상황 닥쳐올 것”
JP “난 더 무서운 짓도 한 사람”

그러나 그 희망의 캔버스는 신군부가 정권의 중심을 전횡하면서 송두리째 망가졌다.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나는 어언 6년의 고독하고 황량한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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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25일 서울 신문로 신화빌딩에서 신민주공화당 현판식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용채·최재구 의원, 김종필 총재, 김효영 의원. [중앙포토]

 86년 가을 나는 ‘박정희 대통령 7주기 추도식’을 준비했다. 박 대통령의 추도식은 그 전에도 몇 번 시도됐으나 전두환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84년엔 전예용·장영순·구자춘·이병희씨 등 5·16혁명 동지들로 구성된 민족중흥동지회가, 85년엔 정일권씨가 중심이 돼서 추도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 요소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5공 정권이 견제하는 바람에 무산되거나 위축됐다. 내가 영구 귀국한 이상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는 추도행사는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치러져야 했다. 행사 일주일 전쯤 내가 7주기 추도식 추도위원장을 하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추도위 고문을 맡는다는 발표를 했다. 전국 2500여 명의 추도위원에게 안내장을 발송하고 일간신문 광고를 통해 박 대통령 추도식을 10월 2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즈음 나를 늘 쫓아다니면서 으르고 위협하던 이가 있었는데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이었다. 안기부는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수장(김재규)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기관 명칭까지 바꾼 조직인데 정치에 개입하고 민간인을 협박하는 일은 여전했다. 하루는 장세동이 나를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 있는 안기부장이 전용으로 쓰는 방으로 불렀다. 그들은 그 방을 안가(安家)라고 했다.

장세동은 “총재님이 하려는 추도식을 중지해 주십시오. 정치를 다시 시작하려는 모양인데 그건 안 됩니다. 그걸 하면 아주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것입니다”라고 협박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 내일이 보이나?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당신한테 이롭다. 내가 이 순간을 기억해 두마. 세상 무슨 짓을 해도 추도식을 중지시킬 순 없다. 나는 더 무서운 짓도 한 사람이다. 당신이나 조심해라.” 박정희 대통령의 품에서 자랐던 저들이 추모행사마저 못하게 하는 행태에 울분이 치솟았다.

그들은 박 대통령 추도식을 계기로 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될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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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 김종필(JP) 전 총리·부인 박영옥 여사·박근혜 큰 영애(현 대통령, 왼쪽부터)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의 공개적인 추도식이 개최된 건 86년 해외에서 귀국한 JP가 5공 정부의 방해를 뚫고 추진한 7주기 때부터였다. [중앙포토]


 나의 거친 대응에 장세동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안기부는 대신 추도식 참석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세버스 회사에 압력을 넣어 운행을 중단시키고 우체국에는 행사 안내장 배달을 지연시키는 유치한 방법을 동원했다.

심지어 행사 당일엔 박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 인터체인지에 헌병들을 배치시켜 서울 동작동행 버스를 돌려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였다.

추도위는 행사 이틀 전 추도식 방해 사례를 적시해 시정을 요구하는 항의 서한을 노신영 국무총리에게 보냈다. 이런 곡절을 겪으면서 86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묘역에서 그분이 돌아가신 뒤 7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추도행사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1만30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 최규하·정일권·박준규·백남억씨 등은 당국의 강요에 굴복했는지 불참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과 민정당 대표 이름으로 조화를 보내왔는데, 아마도 장세동이 뒤에서 벌였던 방해공작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간 어른(박 대통령)께서는 가혹한 비판과 학대를 받아 오셨습니다. 저희들도 참기 어려운 수모(受侮)를 당해 왔습니다만 꾹 참고 묵묵히 지난날을 반성해 왔습니다.… 한동안 저희들의 손과 발을 꽁꽁 묶은 채로 대양(大洋) 한복판에 내던지고 가신 어른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른께서는 저희들에게 더 없는 시련을 주셨고 오늘의 깊은 감회와 뉘우침을 주셨으며, 또 다른 다짐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이룩하신 위업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련과 반성과 다짐은 내 추도사의 키워드였다. 그 위에 박 대통령을 뒷받침했던 근대화 세력이 다시 일어나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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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가 87년 10월 1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촌상(仁村賞) 수상자를 위한 리셉션에 참석해 김대중(왼쪽)·김영삼(가운데)씨와 함께 환담하고 있다. 3김 회동은 80년 2월 25일 이래 7년 만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87년 6·29 선언을 이끌어낸 민주화 투쟁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민주화의 고난엔 불참하고 과실만 따먹으려 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저 “허허허” 하고 웃기만 해왔다. 이제 얘기 좀 하려 한다. 나는 김영삼·김대중씨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다른 길을 걸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민추협(공동의장 김영삼·김대중)이나 신민당(신한민주당)을 같이 할 순 없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당장 반기(反旗)를 드는 것은 반성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는 자책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연장선에서 87년 5월 창당된 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이나 양김 세력과 학생·재야·종교 세력의 집결체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또 87년 10월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평화민주당은 내가 참여를 고려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양김씨는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일관되게 투쟁해왔다. 그들은 정권을 찬탈하고 유신과 비슷한 헌법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을 향해 줄기차게 민주화 투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근대화 세력은 일어나는 방법이 달라야 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근대화 시대를 개척했던 사람이다. 박 대통령의 영광은 영광대로, 그의 과오는 과오대로 고스란히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좋건 싫건 박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이 저질렀던 정권의 허물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공격만 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나보고 유신잔당이라고 하는 사람들한테 “나는 유신본당”이라고 일갈한 것도 박 대통령 시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나는 전두환 정권이 안보나 경제정책 집행 면에서 잘못이 있을 때 정부를 운영해 본 유경험자로서 질책하고 교정하는 게 나의 길이라고 봤다.

 김영삼·김대중씨와 나의 길은 권력 집념이라는 측면에서도 다르다. 두 사람의 정치투쟁은 집권의지와 바로 직결돼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자신이 집권해야만 진정한 민주화가 이뤄진다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집권욕심이 없었다. 대통령을 해보겠다는 건 내 사고(思考)의 영역 바깥에 있었다.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유족하며 편안하면 그만이다. 내가 충남 부여에 미리 만들어둔 묘지에도 써놨지만 국태민안(國泰民安)이야말로 요지부동한 나의 인생철학이자 정치의 보람이었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87년 이래 나의 정치에서 집권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천대받고 희생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 대통령이 18년 동안 깔아놓은 근대화의 길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더라도 경로를 바꿀 수 없으리라는 게 나의 인식이었다. ‘아무리 양김씨가 대통령이 되어 캔버스에 새 그림을 그리더라도 극빈의 나락에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경제 근대화와 단단한 안보의 기반 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근대화, 즉 민주화가 양김씨의 몫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근대화의 기반 위에 민주 국가의 꽃을 피우고 싶었다.

 내가 87년 대선에 출마한 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당을 세우려면 깃발을 치켜 흔드는 대통령 후보가 있어야 한다는 정서가 강하다. 정치일정상 대선 뒤 이듬해 봄에 13대 국회의원 선거가 바로 이어질 예정이어서 총선에 참여할 세력들을 규합할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대선에 출마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총재로서 대선 후보가 됐다.

신민주공화당의 주요 참여세력은 박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한 옛 공화당 출신 정치인과 관료, 전두환 시대 제2야당이었던 국민당(총재 이만섭)에서 탈당한 의원 등이었다. 나의 정치목표는 유신과 5공 때 결핍됐던 참다운 민주주의의 추진력을 만들어 내고, 나라의 안정과 지속적 성장을 뒷받침하며, 땀 흘려 일하는 침묵하는 다수에게 삶의 보람을 안기는 것이었다.

 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득표율 28.0%)·김대중(27.0%)씨는 노태우(36.7%) 후보에게 패배했다. 나의 득표율은 8.1%였다. 양김씨의 후보단일화 실패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 주요 원인이었다.

그런데 양 김씨는 본성상 후보단일화가 처음부터 어려웠다. 두 사람은 대통령병에 걸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자신의 집권에만 몰두했다. 나는 선거 이틀 전인 12월14일 이희일 비서실장을 통해 ‘야3당 후보단일화를 위한 3후보 회동’을 제안했다. 그때 김영삼 후보는 “김종필 후보가 사퇴하고 나에 대해 지지를 선언해준다면 3후보 회동에 응하겠다”는 답을 보냈고 김대중 후보는 “김영삼은 후보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두 사람 다 상대방이 양보하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4등을 했지만 내게 표를 던진 180만 명의 똘똘 뭉친 지지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지지층을 품고 새로운 시대의 캔버스 위에 새 그림을 그려나가리라고 다짐했다.

6·29 선언=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대표가 야권·시민 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발표한 특별선언. 연내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등 8개 항의 조치를 담았다. 이 선언은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이 ‘체육관식 간선제 대선’인 5공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어서 대반전의 극적 효과를 냈다. 뒤에 전·노 두 사람이 합작한 작품으로 드러났다. 김영삼·김대중씨가 앞장선 민주화 투쟁은 목표를 달성한 셈이지만 그때부터 양 김씨는 분열의 길을 걸었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결국 12월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2위인 김영삼 후보와 190만 표 차로 당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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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소사전 장세동(79)=5공 시절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차례로 지낸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 실력자. 육사 16기로 전남 고흥 출신이다.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였고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1979년 12·12에 참여한 핵심 인물로 경복궁 안에 있던 그의 수경사 30경비단장(대령) 사무실은 신군부의 지휘소로 사용됐다. 85년 안기부장에 올라 전 대통령의 정권 관리를 맡았으며 노태우 민정당 대표, 노신영 국무총리와 함께 한때 여권의 후계자군으로 부상했다. 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사건’이 불거지면서 경질됐다. 12·12특별법 등에 의해 김영삼 대통령 시절 4년간 수감됐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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