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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용·한대화·이승엽 … 일본과 싸우며 강해진 한국 야구

김응용·한대화·이승엽 … 일본과 싸우며 강해진 한국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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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는 일본과 싸우며 성장했다. 1950년대 시작된 대결에서 수없이 진 것은 당연했다. 일본은 1870년 야구를 받아들였고 1936년 프로야구를 출범했다. 반면 한국에 야구가 들어온 건 1904년이고 1960년대까지 ‘동네 야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행 주자 일본은 국제경쟁력을 갖추며 발전했고, 한국은 일본을 목표로 빠르게 성장했다.

영욕의 한·일전 반세기 <중> 야구
해방 이후 7전7패 수모 당하다 … 1963년 김응용 투런포로 첫 승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등 정신력 앞세워 국제대회 잇단 승리
객관적 전력 아직 한 수 아래지만 2000년 이후 13승16패 박빙 승부


야구 한·일전의 시작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 원정이었다. 조선 최강이었던 YMCA 야구단은 경성에 있는 일본인 팀들을 모두 꺾은 뒤 1912년 11월 일본으로 떠났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일본 원정이었다. 조선 야구사는 ‘일본을 정복한다는 결심에 선수들의 피가 끓는 듯했다’고 썼다.

일본 원정은 일본 야구전문지 월간 ‘야구계(野球界)’ 1912년 12월호에 상세히 소개됐다. 홍순일 야구박물관 자료수집위원회 위원장이 소장한 ‘야구계’ 사본에 따르면 최초의 한·일전은 와세다 도쓰카 구장에서 만원 관중의 열기 속에 치러졌다. YMCA 야구단은 일본 최강 와세다대학과의 경기에서 0-23으로 졌다. 이후 고교·대학 팀들과 경기를 치러 1승1무5패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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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이 다시 시작된 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뒤였다. 한국은 1954년부터 62년까지 아시아 야구선수권에서 일본을 일곱 번 만나 모두 졌다. 59년엔 1-20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한·일전은 63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연거푸 꺾고 우승한 것이다. 당시 육군 경리단 소속 ‘일병’ 김응용은 일본과의 2차전에서 1-0으로 앞선 8회 투런 홈런을 터뜨려 3-0 승리를 이끌었다. 대회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선수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조명탑 설치’를 약속했다. 김응용은 “일본전을 앞두면 전날 밤 선배들이 찾아와 ‘꼭 이겨야 한다’며 압박했다”고 떠올렸다. 이후 한국은 아마추어 대회에서 일본과 승패를 주고받는 라이벌이 됐다.

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이 한국에서 열렸다. 최동원·김시진·김재박·임호균 등은 프로 진출까지 미루고 대회에 나섰다. 풀리그 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나란히 7승1패를 기록하며 최종전에서 만났다. 대회를 앞두고 일본 문부성이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를 일으켜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국은 7회까지 0-2로 끌려가다 8회 김정수의 2루타로 한 점을 따라붙었다. 희생번트로 만든 1사 3루에서 김재박이 유명한 ‘개구리 번트’를 성공했다. 일본 배터리가 스퀴즈 번트를 대비해 피치아웃을 했지만 폴짝 뛰어올라 번트로 동점을 만든 것이다. 훗날 김재박은 “어우홍 감독은 사인 미스라고 말했지만 내가 상황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회상했다. 한국은 이어 이해창의 안타로 1사 1·3루를 만들었다. 한대화는 풀카운트에서 공을 힘껏 잡아당겼다. 왼쪽 파울폴을 맞고 떨어지는 역전 스리런포. 아직까지도 한·일전 최고의 순간으로 꼽히는 장면이다. 한국은 5-2로 이겨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 한대화는 “당시엔 택시를 타도 , 술집에 가도 공짜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용돈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한국 야구의 수준은 여전히 일본보다 아래였다. 최정상급 실력을 가진 일본 프로선수들은 국제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90년대 프로선수들이 맞붙은 수퍼게임은 실력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는 무대였다. 한국은 91년 2승4패, 95년 2승2무2패, 99년 1승1무2패에 그쳤다. 일본이 주전들을 내세우면 맥을 추지 못했다. 99년 마쓰이 히데키는 한국의 에이스들을 상대로 7타수 7안타(1홈런)를 치기도 했다.

국제야구연맹(IBAF)은 90년대 후반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을 허용했다. 한국은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프로 올스타로 구성된 드림팀을 꾸렸다. 당시 LA 다저스에서 뛰었던 박찬호도 합류했다. 결과는 13-1 대승. 충격을 받은 일본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프로선수들을 내보냈지만 예선전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에 연패했다. 일본 킬러 구대성과 국민타자 이승엽이 일본을 무너뜨렸다. 일본은 2003년 아시아선수권과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을 이겼다.

한·일전의 백미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었다. 2006, 2009년 두 나라는 스즈키 이치로와 박찬호·김병현 등 메이저리거까지 총동원해 4승4패를 기록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두 차례 꺾었다. 라이벌의 뜨거운 대결은 한·일 야구의 인기를 높였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초기 한·일전은 정신력으로 일본에 맞서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과 미국을 배우면서 압축성장을 이뤘다. 위기를 느낀 일본도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양국 모두에 한·일전은 성장의 자양분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 이후 한국의 일본전(친선경기 제외) 성적은 28승41패다. 다음 대결은 새로 창설된 국가대항전 ‘프리미어 12’다. 11월 8일 일본 삿포로돔에서 열리는 대회 개막전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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