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한·일전 반세기 <상> 축구
이승만 “한국 땅 일장기 안 된다”
1954년 3월 도쿄서 건국 후 첫 경기
90년대 미우라 전담 수비한 최영일
“야쿠자 살해 협박에 일본여행 못 가”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 민족에게 축구 한·일전은 과거사에 대한 위안이자 격려의 장이었다. ‘축구만큼은 우리가 일본을 앞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최초의 한·일전도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성사됐다.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54년 3월 한국은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을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는 걸 허락할 수 없다”며 일본 대표팀의 입국을 불허했다. 그래서 홈 앤드 어웨이 경기를 모두 일본에서 치러야 했다.
이유형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은 “건국 후 첫 한·일전이었다.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는 서약서를 썼다”고 털어놓았다. 3월 7일 도쿄 메이지진구 경기장에서 열린 1차전은 때아닌 폭설로 진흙탕이 된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한국 선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5-1 대승을 거뒀다. 일주일 뒤 열린 2차전은 2-2 무승부로 마쳤다. 이후로도 월드컵·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 본선 길목에서 한국은 번번이 일본을 주저앉혔다.

70년대 대표팀 수문장 이세연(71) OB축구회 부회장은 “많은 사람이 우리가 일본보다 축구 실력이 좋았다고 알고 있지만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보다 먼저 선진축구를 받아들인 일본의 수준이 더 높았다”며 “일본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결국 정신력이었다. 당시엔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해도 일본은 이겨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한·일전 전날엔 긴장감 탓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목적(승리)을 위해 과정(페어플레이)이 무시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친 파울이 난무했고, 심판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주먹과 발이 오갔다. 60년대 한·일전에 나섰던 한 원로 축구인은 “스타킹에 작은 못 하나를 숨겨 나갔다가 심판 몰래 상대 선수를 푹 찌른 뒤 그라운드에 버리곤 했다. 한 번 겁을 주고 나면 손에 뭔가 쥐고 있는 척만 해도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잘못된 행동인 걸 알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한·일전에서 진다’는 걸 국민이 용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90년대 인기를 누린 송재익(73) 전 스포츠캐스터는 “한·일전은 언제나 뜨거웠다. 복싱경기 도중엔 관중석에서 ‘일본놈 죽여라’는 고함이 수시로 터져나왔다”고 옛 기억을 되짚었다.
최근의 축구 한·일전은 예전과는 달라졌다. 더 이상 승리에 집착하지 않는 분위기다. 일본 축구가 성장한 탓에 맞대결에서 속시원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한국 사회가 꾸준히 발전하면서 일본을 뛰어넘는 분야가 많아져 더 이상 축구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김 박사는 “이전 축구 한·일전의 키워드가 ‘전투’와 ‘승리’였다면 이제는 ‘문화’와 ‘역사’ ‘공존’으로 나가야 한다”며 “21세기 축구 한·일전의 지향점은 두 나라가 장점을 주고받는 호혜주의다. 일본 축구 시스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에 우리가 가진 경쟁력을 나눠주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