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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은혼에 부치는 노래

중앙일보 2015.09.22 01:11 종합 3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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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내가 처음 쓴 곡은 ‘은혼에 부치는 노래’였다. 나는 이제 막 작곡 공부를 시작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부모님이 결혼 25주년을 맞으셨다. 가난한 시절이었고 결혼기념일은 아직 낯선 개념이었다. 파티를 벌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셨다. 당시 청주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한 번은 긴 시와 함께 편지를 보내셨다. “올해가 우리의 결혼 25주년인데 내가 쓴 이 시에 네가 곡을 붙여서 불러 드리면 다른 잔치가 없어도 네 어머니를 기쁘게 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다사다난한 도전 극복하며 우리는 오늘을 이루었다
목표 상실한 채 맞는 무사무난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시를 보니 “정녕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소”라는 서두로 시작해 회령·평양 등을 거쳐 6·25 때 남하해 제주도와 서울에서 살았다는 회상, 그리고 이제 청주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소회, 가난했지만 같이 있었으므로 “잿더미도 보금자리요” “죽는 고비도 웃고 넘을 수 있었다”는 고백, 이제 우리의 등걸에 새 가지들이 자라나 내일의 꿈을 피우고 있으니 부디 오래 복되게 살았으면 한다는 바람 등 간단한 노래가 아니라 작은 칸타타가 될 만한 내용이었다. 지금 다시 보면 가사만 빼고는 슈베르트의 영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진한 작품이었지만 어쨌든 곡을 완성해 보냈고 아버지는 계획대로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셨다. 이 곡을 쓰면서 아직 10대였던 나는 “25년? 정말 오래 같이 사셨네”하고 생각했었다.

 음악은 시간 위에 펼쳐진다. 다른 시간예술도 그렇지만 음악은 유난히 짧고 집중적이다. 음악에서 5분은 긴 시간이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은 7분 남짓이다. 그 곡에 담겨 있는 예술적 내용에 비하면 퍽 짧다. 연극이라면 7분은 전체의 상황과 몇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데에 빠듯한 시간이다. 아직 본격적인 드라마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운명교향곡’의 첫머리 “타타타 타-안, 타타타 타-안”은 10초도 안 걸리지만 그 드라마의 격렬한 분위기와 그 곡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을 각인시켜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 ‘생일 축하 노래’는 노래 전체가 10초 남짓이지만 그 안에 기-승-전-결을 다 가지고 있다(한 번 속으로 음미하며 불러보시기 바란다). 완결된 하나의 짧은 드라마다. 삶을 길게 살고 싶은 분들은 음악을 많이 들으면 될 것 같다. 음악은 시간을 압축해 밋밋하게 흘러가는 삶에 주름을 잡아 주니까. 그래서 주름을 펴면 훨씬 더 긴 삶의 시간이 펼쳐지도록 만들어 주니까.

 다사다난이 삶의 시간을 길게 만들어준다는 말도 될 것 같다. 내가 ‘은혼에 부치는 노래’를 쓰면서 “참 오래 사셨네”하고 느낀 것은 내 삶의 연조가 짧은 탓도 있지만 우리 아버님 대의 삶이 유난히 파란만장했다는 점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그 노래의 가사에도 반영돼 있지만 식민지 지배, 해방, 분단과 전쟁, 피란, 가난 등 치욕과 고난, 희망과 절망, 분노와 비참이 교차되고 점철된 시대였다. 은혼을 맞아 회고할 바가 많은, 주름이 깊은 삶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 세대의 삶은? 주름이 없이 밋밋이 흘러간 삶이었던가? 아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난 50년 동안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연말이 없었다. 그 다사다난을 열거할 필요는 없으리라. 많은 도전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 덕분으로 우리의 역사는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나아갔고, 그 결과 가난한 후진국에서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한 선진국 대열의 나라가 됐다. 그러니 다사다난은 두렵지 않다. 음악에서 보면 그것은 치열한 기-승-전-결들의 산맥이요, 삶에서 보면 그것은 역사를 단축하는 주름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오히려 역사도 망각하고 목표도 상실한 채 맞이하는 무사무난의 미래다.

 다사다난이 두렵지 않다고 해서 망국이나 전쟁, 치욕과 비참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이러한 일들이 없는 주름의 산맥은 어떤 것일까. ‘운명교향곡’에서 듣는 열정의 분출과 부딪힘, 인내와 대화, 균형과 조화가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시대를 살 수는 없을까. 그런 시대의 비전을 보여주는 역할을 오늘 50주년을 맞은 중앙일보에 기대한다.

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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