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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릴레이 기고] (21) 총론에서 각론으로, 스밈과 번짐으로

중앙일보 2015.09.22 01:06 종합 3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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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이사장

지난 6월 하순 평화 오디세이는 단둥(丹東)에서 훈춘(琿春)까지 압록강과 백두산, 두만강을 잇는 북한·중국 국경 1400㎞를 주파했다. 이번 여정은 분단 70년에 생각해 보는 평화와 통일, 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협력, 평화와 공존에 필요한 세계 시민성 등 폭넓은 스펙트럼의 주제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깊숙이 분석한 좋은 기회였다. 동행한 이 시대 최고의 지성과 전문가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여러 권의 책을 요약한 것보다 더 깊숙이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 평화 오디세이가 얼마나 많은 꾀와 인내와 노력 그리고 정치한 실행력을 필요로 할 것인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전부 아니면 전무인 직렬의 선택은 곤란
남북 현안은 병렬로 연결해 해법 찾아야

 
오디세우스는 승리한 도취감 속에서 신나게 귀향길에 올랐건만 상상할 수 없는 10년의 풍파와 고난을 겪는 역설적 항해를 했다. 우리의 평화 오디세이는 평화를 넘어 통일로 가야 하기에 호메로스의 서사시보다 훨씬 많은 변수와 모험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배는 바람이 돛을 밀고 당겨서 나간다고 말하지만 실제 항해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바람은 앞바람·뒷바람·옆바람·무풍 등 종류도 풍속도 다양하다. 돛은 물론 배의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무엇보다 선원의 구성이나 숙련도가 천차만별이다. 구체적으로 알고 배를 다루지 못하면 회의처럼 춤추고 담론처럼 널뛰다가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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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촨(防川) 전망대로 가는 버스 창에서 본 두만강의 어부. 배를 손으로 끌고 있다. 노를 젓기보다 배를 끄는 게 수월한 사정이라 짐작할 뿐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리 사회에 평화통일과 관련된 총론은 넘치지만 실용적 각론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추상적 접근이나 로드맵으로 우선 갈증을 풀 수는 있겠지만 결국 2%가 부족하게 된다. 기상천외한 비대칭 전략과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 온 우리의 상대는 계속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 나갈 것이다. 평화 오디세이가 순항하려면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읽고 선제적 대응을 해내거나 즉각 수습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각론을 미리 개발하고 숙지해야 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실전적 매뉴얼 만들기가 시급하다. 명령은 선장이 내리지만 배는 조타수가 몰고, 작전은 지휘관이 하지만 전선은 병사의 몫임을 충분히 감안한 구체적 지침을 현장은 필요로 한다.

 남북 문제에서는 작은 일이 큰일일 수 있다. 신도 악마도 디테일 속에 있다고 하듯 작은 일이 중요하다. 사소한 동티일수록 조심스럽게 다루는 지혜가 필요하다. 커 보이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을 집중 투입하나 작아 보이면 외면하고 홀대하지 않는지 경계해야 한다. 작아 보여도 큰 것보다 힘이 세기도 하고 결정적 변곡점이 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제국 진과 마지막 제국 청은 모두 하급 관리나 사병이 저지른 작은 우발적 사고 때문에 망했다. 서양 속담이 이르는 대로 최후의 볏짚 하나가 낙타를 압사시키며, 이중톈(易中天)의 표현대로 작은 불씨가 초원 전체를 불사르기도 한다. 어린이의 조막손이 물구멍을 막아 댐의 붕괴를 면한 이야기는 좋은 반면교사가 된다.

 평화 오디세이는 어려운 문제일수록 병렬로 놓고 해법을 찾아가는 우회의 항해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전구가 병렬 연결되면 하나가 꺼져도 나머지는 안 꺼진다. 직렬일 때는 한 곳이 끊어지면 모두 꺼져 암흑이 된다. 남북이 대결하는 황천의 바다에는 핵, 미사일, 방사포, 특수부대, 연평도 피격, 천안함 피폭, 5·24 조치,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인도적 지원 등 수많은 쟁점의 전구들이 널려 있다.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남북의 현안을 직렬로 놓고 풀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선택이 되기 십상이다. 외통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폭풍의 바다에 불이 많이 켜져 있을수록 방향 가늠하기가 좋다.

 평화와 통일은 고도의 멘털 게임이다. 북한 주민의 마음 훔치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주변국이 반대해도, 우리가 싫어해도 어렵지만 특히 북한 주민들이 바닥에서부터 거부한다면 평화 오디세이는 전진하기 어렵다. 우리처럼 사촌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북한 주민들의 집단심리를 녹이는 것이 관건이다. 일방통행식 북한 대하기는 낭비와 도로(徒勞)가 된다. 북한 주민의 눈높이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잘 파악하는 것이 바른 해법의 시작이다. 이념적 자극보다는 K팝에 흔들리고, 초코파이보다 샴푸를 더 갖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 제대로 마음을 훔치는 길이다. 스밈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거부반응 없이 젖어들며 자연스럽게 번짐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스밈과 번짐은 평화 오디세이 최고의 동력이다.

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한국콘텐츠공제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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