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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일본 배우 '키키 키린' 순박한 얼굴에 묻어나는 인생의 깊이

중앙일보 2015.09.0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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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설적인 배우 중 한 명인 키키 키린(72). 그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다 보면 키드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에 손을 모으고 웃는 표정이 될 것 같다. 키키 키린 특유의 그 귀여운 웃음 말이다. 20대부터 연극 무대, TV 드라마, 영화를 오가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그는 최근에도 일본의 내로라하는 감독들의 영화에도 활발하게 출연하고 있다. 그가 연기하는 할머니 또는 어머니는 한마디로 압축하기 어렵다. 그저 푸근한 미소만 짓고 있는 할머니나 어머니를 연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말이다. 동그란 눈을 개구쟁이처럼 굴리며,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키키 키린은 매번 다른 어떤 배우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을 뽐낸다. 최근 국내 개봉작을 중심으로 그 매력을 살폈다.

<“단팥을 만들 때 난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앙:단팥 인생 이야기│9월 10일 개봉│가와세 나오미 감독│도쿠에 역
도쿠에가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의 도라야키 가게에 찾아온 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그 작은 가게에서 도쿠에는 굽은 손으로 단팥을 만든다. 지난 50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단팥을 만들 때 도쿠에는 마치 옹알이하는 갓난아기를 돌보듯 한다. 팥의 모양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의 냄새를 맡고, 주걱으로 휘젓기 전에 팥과 설탕이 친해질 시간을 주고, 팥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센타로의 눈에는 이런 도쿠에가 신기할 뿐인데, 도쿠에는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는 듯 군다. 단팥을 만들 때만이 아니다. 도쿠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만의 언어를 가졌다고 믿고 그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봄날의 벚나무, 여름 햇볕, 가을바람이 거는 이야기에 화답하고, 그럴 때마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한다.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을 처음 만나는 소녀처럼, 때로는 삶의 우여곡절을 다 거친 품 넓은 할머니처럼 미소 짓는 키키 키린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맛있는 부분이다. 그 모습으로부터 도쿠에가 배우는 건 맛 깊은 단팥을 만드는 방법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도쿠에를 통해 무자비한 세상에 지지 않고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용기,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키키 키린이야말로 이 영화의 단팥이자 벚꽃이다.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걸어도 걸어도│2008│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토시코 역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즐겨 작업하는 배우다. 평온한 듯한 분위기 아래 복잡하게 물결치는 감정을 담아내는 고레에다 감독. 그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 키키 키린은 온화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어머니 혹은 할머니를 연기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는 ‘걸어도 걸어도’의 토시코. 큰아들 준페이의 기일,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 부모 집에 모인다. 토시코가 딸(유), 며느리(나츠카와 유이)와 함께 끊임없이 음식을 내오는 주방은 시끌벅적하고, 오랜만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집안에는 생기가 돈다. 하지만 웃는 얼굴들 사이로 해묵은 갈등과 각자의 속셈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이어진다. 더운 한낮, 대학생 요시오가 이 집을 찾은 순간도 그렇다. 10년 전, 준페이는 그를 구하러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살뜰하게 요시오를 챙기던 토시코는 요시오가 돌아간 그날 저녁, 매년 기일에 그를 집으로 부르는 속내를 밝힌다.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그 순간 토시코의 얼굴에 잠시 그림자가 지난다. 아들을 잃고 천불이 나는 세월을 지나 온,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읽히는 표정이다.

<“잘 있거라, 아들아.”>


오다기리 죠의 도쿄 타워│2007│마쓰오카 조지 감독│엄마 역
마사야(오다기리 죠)는 철없는 아들이다. 집안을 돌보지 않는 남편(코바야시 카오루)을 떠나 홀로 아들을 키우는 엄마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집이 있는 탄광 마을에서 떨어진 고등학교,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며 엄마와 떨어져 지냈던 마사야. 그는 엄마가 힘들게 보내 주는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늘 마사야를 응원한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대학 졸업이 어렵다는데도 “열심히 좀 하지” 한마디 뱉는 게 전부다. 그러고는 금방 씩씩한 목소리로 “엄마도 1년 더 힘낼 테니 너도 학교 1년 더 다녀라”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언제나 자신보다 아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은 전통적인 어머니상 그대로지만 이 영화의 엄마가 유독 더 귀엽게 느껴지는 건 키키 키린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천진난만함에 빚진 바 크다. 술자리에서 기분 좋아지면 코주부 안경을 쓰고 이상한 춤을 추는 엄마의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연기한다. 극 후반,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를 보며 마사야는 그 큰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감정이 십분 전해지는 건, 키키 키린이 살뜰하게 그려낸 엄마의 순박한 매력 덕분이다.


<“유이치는 내가 키웠어. 내 아들이야.”>


악인│2010│이상일 감독│시미즈 역
시미즈의 손자 유이치(츠마부키 사토시)는 살인범이다. 그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여성(미츠시마 히카리)을 죽였다. 연약한 여자를 아무도 없는 밤길에서 목 졸라 죽이다니, 다들 유이치가 극악무도한 살인마라 떠든다. 유이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유이치는 엄마에게 버려진 뒤로 할머니 시미즈 손에 컸다. 시미즈에게 유이치는 착한 손자다. 시미즈는 때때로 그런 유이치를 이용한다. 유이치에게 남편의 병간호를 맡기고 몰래 홍보관에 다니는 것. 그러다 협박받고 비싼 약을 강매당한다. 그렇다. 시미즈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경우든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유이치에 대해 남들이 뭐라 떠들어도 시미즈에게 그는 생때같은 손자, 아니 직접 키운 아들이다. ‘악인’에 나오는 인물 모두가 시미즈처럼 웬만큼 속물적이고 잘못된 구석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는 자신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위하려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을 깔보는 데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악인일까. 평범한 촌부 같아 보이던 시미즈가 유이치의 행방에 대해 묻는 취재진에 둘러싸여 넋 나간 표정을 지을 때, 언뜻 그 답이 비치는 듯하다.


글=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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