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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역에서 ‘천만 요정’으로 心 스틸러

중앙일보 2015.09.0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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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단역에서 ‘천만 요정’으로 心 스틸러

박찬욱 감독이 옴니버스 인권 영화 ‘여섯 개의 시선’(2003) 중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연출할 때, 그는 극 중 파출소장을 연기할 배우를 찾고 있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인 동시에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감독이 박 감독에게 슬쩍 물었다. “정말 이상하게 생긴 배우가 한 명 있는데, 보실래요?” 과연 듣던 대로 ‘정말 이상하게 생긴 배우’가 왔다. 얼굴의 점도, 말투도, 연기도 이상한, 그냥 모든 게 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이상했던 건, 그에게 자꾸만 끌린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엉뚱하고 독특하게 연기했어요. ‘마지막 늑대’(2004)를 만든 구자홍 감독(당시 조감독)이 어디서 보고 추천했는데, 만나자마자 아주 반했죠.”

그 ‘어디서’란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 김동원 감독)를 말한다. 극 중 황제 디스코텍에서 열린 디스코 경연 대회. 참가 번호 1번 ‘로미오와 줄리엣’ 팀. 어설픈 볼룸 댄스로 플로어를 어지럽힌 커플 가운데, 콧수염 난 로미오가 바로 오달수였다. 언뜻 4등신처럼 보일 만큼 큼지막한 얼굴로 ‘아주 엉뚱하고 독특하게’ 연기하던 단역 배우를 잊지 않은 구 감독 덕분에, 오달수는 박 감독에게도 잊지 못할 배우가 되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올드보이’(2003)에도 캐스팅됐다. 잔뜩 겁에 질린 오대수(최민식)의 앞니에 장도리를 대고 시간 끌면서 비열하게 웃는 남자. 계속 싸우자고 덤비는 대수에게 시종 독특한 표정과 말투로 받아친 사설 감옥 주인 철웅(오달수). “아… 악바리다.” 괴상한 억양으로 나지막이 중얼댄 철웅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연극 팸플릿 돌리다 시작한 연기>

그리하여 ‘정말 이상하게 생긴’ 오달수가 배우가 된 과정 또한 매우 이상했음이 차츰 밝혀졌다. 학교 다닐 때 우연히 본 연극 한 편 때문에 연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스토리따위는 없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연극 보러 갈 때, 그는 당구를 쳤다. 자신이 배우가 될 줄 어떻게 알았으랴. 대학 떨어지고 재수하던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부산의 인쇄소에선 인근 소극장의 연극 팸플릿을 도맡아 찍었다. 팸플릿을 배달하는 건 오달수의 몫이었고. 그는 그때 ‘연극하는 인간들’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밥 해서 나눠 먹고, 욕심 없이 살면서도 행복한 표정인 인간들. 연출가 이윤택이 이끌던 극단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었다.

그 패거리에 끼고 싶어서 극장에 놀러가 청소하던 재수생은, 대학생이 되어도 그곳에 남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얼쩡거린 끝에 드디어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연극 ‘오구’의 상갓집 ‘문상객 1번’. 무대 위에 둘러앉아 화투치는 역할. ‘문상객 1번’은 8년 만에 ‘맏상주’ 역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97년, 연극 ‘남자 충동’의 주인공이 된 오달수는 서울 대학로에 진출한다.

그가 극단 ‘신기루 만화경’을 차려 서른 명 넘는 단원을 거느리게 된 것은 2000년. 극단 대표 오달수는 후배들에게 술 사 주고,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닥치는 대로 찾아 다닌 일 중 하나가 영화 단역. 부산 사투리가 자연스러워 곽경택 감독 영화에서 배역 하나는 얻을 줄 알았다. 하지만 ‘친구’(2001)와 ‘똥개’(2003) 오디션에서 모두 떨어졌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떨어진 뒤에야 간신히 ‘해적, 디스코왕 되다’ 오디션에 합격. 사흘을 촬영하고 출연료로 100만원을 받았다. 13년 차 가난한 연극 배우, 서른네 살의 알바생은 그렇게 영화 배우가 되었다. 아니,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해 두자.

  

<악당과 괴물에게도 연민을 품다>

‘올드보이’ 개봉 뒤, 오달수는 갑자기 바빠졌다. 2005년에만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 두 편은 심지어 개봉일이 같았다. 2006년엔 아홉 편. 대부분 악역이었다. “악역을 연기할 때마다 생각한다. 무조건 악하게만 보이지 말아야겠다. 관객이 연민을 느낄 수 있는 표정을 보여줘야겠다. 연기하는 나부터 캐릭터에 연민을 느끼지 못하면 절대 관객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오달수는 특히 ‘달콤한 인생’(2005, 김지운 감독)에서 연기한 무기밀매상 명구에게 연민을 느꼈다. 센 척하지만 실제로는 강하지 못하고, 뭔가 서툴러서 우스운 인물. 관객이 배우 오달수에게 갖는 연민도 다르지 않았다. 명구가 선우(이병헌)의 총에 맞고 죽을 때, 감독을 원망한 사람이 오달수 혼자만은 아니었을 거다.

‘괴물’(2006, 봉준호 감독)에서 괴물의 목소리를 연기할 때도 오달수는 비슷한 연민을 품었다. 당시 미국의 한 사운드 업체가 온갖 동물 소리를 배합해 괴물 소리를 만들어 보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괴물의 작은 숨소리에도 섬세한 감정이 담겨 있길 원했다. 고민 끝에 오달수에게 의지했고, 그는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괴물이 죽는 장면에서 ‘어떻게 보면 괴물도 피해자’라고 생각했다는 오달수는 죽어가는 괴물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진짜로 울어버렸다. 봉 감독이 오달수를 선택한 이유이자, 우리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가 관객의 마음을 훔친 비결>

오달수는 이제 ‘그들 편’에 서 있던 악당에서 ‘우리 곁’의 조력자로 자주 등장한다. 악당 역할을 나눠 갖던 많은 배우들의 연기 폭이 좁고 뻔해지는 동안, 그가 연기하는 인생은 넓고 깊어지고 있다. ‘음란서생’(2006, 김대우 감독) ‘우아한 세계’(2007, 한재림 감독)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김석윤 감독) ‘7번방의 선물’(2013, 이환경 감독) ‘변호인’(2013, 양우석 감독) ‘국제시장’(2014, 윤제균 감독)에 이어 ‘암살’(7월 22일

개봉, 최동훈 감독)과 ‘베테랑’(8월 5일 개봉, 류승완 감독)까지. 돈키호테의 산초, 셜록의 왓슨 그리고 배트맨의 로빈처럼 주인공의 짝패이자 사이드킥(Sidekick) 캐릭터에 지금, 오달수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 ‘문상객 1번’이 ‘맏상주’로 성장한 것처럼, 디스코왕을 꿈꾸던 ‘콧수염 난 로미오’가 지난 10여 년 동안 자기 만의 보폭으로 오르막을 성실하게 올라 여기까지 왔다. ‘신(Scene) 스틸러’에서 ‘심(心) 스틸러’로.

연극 배우로 생활하며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극은 절대 배우를 배신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버텨준 사람에겐 반드시 보답한다. 10년 이상 연기하면서 쌓아 온 그 세월이, 절대 널 배신하지 않을 거다.” ‘암살’을 보니 알겠다. ‘베테랑’을 보니 또 알겠다. 이 배우는 어제도 관객의 마음속에 들어갔으니, 오늘 또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 오늘 자신의 배역을 진심으로 연민했으니, 내일 또 다른 인물의 삶을 훔쳐낼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한 발 한 발, 우리의 가슴 속으로 더 깊이 들어오고 있는 거라고. 배우 오달수, 당신 지금 참 멋지다.


글=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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