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르켈의 두 얼굴 … 여제 그리스 빚 갚아라 VS 난민 받아들이자 엄마

중앙일보 2015.09.19 01:25 종합 12면 지면보기
‘냉혹한 빚쟁이에서 난민의 영웅으로.’

독일, 정치·경제 ‘유럽 맹주’로 이끌어
극과 극 이미지 밑바탕엔 실용주의
원칙 지키며 정세 파악 후 선제대응

 지난 6월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는 앙겔라 메르켈(61) 독일 총리의 얼굴에 히틀러의 콧수염을 그린 포스터가 나붙었다. 가혹한 채무 이행을 요구하는 메르켈 총리를 ‘독일 역사상 최악의 악당’에 비유한 것이다.

 2개월이 지난 지금 메르켈 총리는 가엾은 난민들을 끌어안는 ‘영웅’이 됐다. 지난 10일 연방 이민난민청 베를린지부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난민들의 손을 잡으며 격려하고 함께 셀카를 찍었다.

 유럽 난민 위기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푸근한 ‘엄마’로 변신한 그에게 ‘무티(Mutti)가 돌아왔다’고 찬사를 보냈다. 무티는 독일어 ‘어머니(Mutter)’의 애칭이자 메르켈 총리의 별명이다. 10년 집권 동안 화해와 조정의 정치를 해 온 그에게 독일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실용주의 원칙 고수=180도 달라진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메르켈 총리가 보여준 리더십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AP통신은 지난 14일 “난민 위기가 메르켈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사안이 다른 두 위기에 대응하는 그의 모습이 대조적인 것으로 비춰지지만 일관된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이 급증하자 결단을 내렸다. 유럽연합(EU)이 규정한 국제법인 ‘더블린 조약’의 유보를 선언한 것이다. 지난달 21일 독일 연방이민·난민청(BAMF)은 “시리아 국적 난민에 대해 예외적으로 더블린 조약 적용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2003년 마련된 ‘더블린 II’ 조약은 처음 들어온 국가에서 난민 신청을 하도록 규정했다.

 독일의 선제적 조치에 유럽 각국은 당황했다. 지난 2일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도 급변했다. 영국·프랑스 등도 독일의 뒤를 따라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AP통신은 “메르켈 총리의 정책은 실용주의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원칙을 바꾸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정세를 파악한 뒤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처음부터 난민에 관대했던 건 아니다. 지난 7월 공영방송 NDR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딱한 사정을 호소하던 팔레스타인 난민 소녀 림 사윌(14)에게 냉정하게 답변해 비난을 받았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모든 난민에게 (독일에) 들어오라고 하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도, 난민 소녀를 울린 발언도 메르켈 총리 특유의 실용주의에서 비롯됐다. 메르켈 총리는 사태 추이를 신중하게 지켜본 뒤 독일 내부의 여론을 다독였고 결정적 순간에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유럽에서 통합은 보수의 가치=국내 독일 전문가들은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 대해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이들은 ▶동독 출신 총리로서의 경험 ▶시스템에 기반한 독일 실용주의 ▶선제적인 위기 대응 능력 등이 메르켈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메르켈 총리의 개인적인 경험과 현실·이상의 균형을 중시하는 독일 정치의 특성이 결합된 리더십”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유럽의 보수정당은 때로 미국 민주당보다도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는다”며 “유럽의 관점에서 공동체와의 통합은 보수의 가치며 메르켈 총리가 이를 충실히 실현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택환 전 경기대 교수는 “동독 출신으로 통일을 경험했고 정치적 부침을 겪어 본 메르켈 총리는 실용주의가 뭔지 가장 잘 알고 있고, 정치적 성과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교수는 “아데나워 이후 독일 총리들의 리더십을 관통하는 건 시스템에 의한 위기 대응 능력”이라며 “문제가 발생하면 면밀히 상황을 분석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거주 독일인들은 메르켈 총리의 난민 포용정책에 대해 “독일이 추구하는 가치를 잘 실현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한국외대 교수는 “대다수 독일인은 위험에 처해 있는 난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장기적으로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가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 번역가인 이다 마리(여)는 “메르켈 총리가 지난 10년간 국민을 100%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문제를 잘 해결해 왔고 독일 정치를 안정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독일이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바람직한 정책”이라며 “다문화 사회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겠지만 숙련된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독일 사회로서도 이득이 된다”고 말했다.

 ◆정치·경제 모두 ‘유럽 맹주’ 되나=이미 경제력에서 유럽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독일은 정치적 영향력에서도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스 경제 위기와 유럽 난민 위기를 거치면서 이 같은 경향은 더욱 강해지는 분위기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승전국이었던 영국·프랑스를 제치고 70년 만에 다시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는 모양새다. 이 같은 행보 뒤엔 10년 동안 독일의 부흥을 이끈 메르켈 총리가 있었다.

 난민 위기 과정에서도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들었다 놨다’하는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선제적으로 국경을 개방해 다른 나라들의 난민 수용을 유도한 뒤 14일 유럽연합(EU) 내무장관 회의를 앞두고선 오스트리아와의 철도를 일시 폐쇄하며 ‘실력 행사’에 나서기도 했다. EU 집행위원회의 난민 의무 할당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독일의 책략이란 분석이 나왔다.

 유럽의 관문인 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동유럽 국가들이 난민 할당에 반대하면서 난민 위기가 독일의 뜻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독일이 유럽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 민감한 독일이 EU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켜 나갈 것으로 분석한다. 지난해 EU 집행위원장 선출을 놓고 영국과 갈등을 빚었지만 결국은 장클로드 융커 전 룩셈부르크 총리를 선출시켰다. 올해 그리스 경제위기 해법을 놓고서도 독일은 프랑스와 미묘한 의견 차를 보였지만 구제금융 합의 과정을 주도했다.

 한스 쿤드나니 영국 버밍엄대 독일연구소 연구원은 올해 초 발간한 『독일의 역습(The Paradox of German Power)』에서 “앞으로 유럽 문제의 관건은 독일이 어떤 방식으로 경제력이란 무기를 더욱 가혹하게 휘두를 것인가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S BOX] 서독서 태어나 동독서 자란 물리학 박사 ? 10년째 집권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독일 정치사에 여러 기록을 남겼다. 첫 여성 총리이자 동독 출신(태어난 곳은 서독 지역이었던 함부르크) 총리이며 첫 과학자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는 1954년 함부르크에서 개신교 목사인 호르스트 카스너의 장녀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메르켈은 부모님과 함께 옛 동독 지역으로 이주했다. 목사가 부족했던 동독 지역의 목회 활동을 위해서였다.

 73년 라이프치히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78~9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77년 물리학자인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으나 82년 이혼하고 통일 후인 98년 화학 교수인 요아킴 자우어와 재혼했다. 첫 남편과 이혼했지만 메르켈이라는 성(姓)은 버리지 않았다.

 메르켈은 냉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89년 민주개혁당(DA)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한다. 90년 통일 후 DA와 서독의 기독교민주당(CDU)이 합당하면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헬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청소년부·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한때 ‘콜의 정치적 양녀’로 불렸지만 콜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자 제일 먼저 거리를 뒀다. 2000년 비자금 문제로 볼프강 쇼이블레(현 재무장관)가 물러난 뒤 CDU 대표로 선출됐다.

 2005년 대연정을 통해 총리에 오른 메르켈은 집권 3기를 거치며 강한 독일을 이끌었다.

 메르켈 총리는 2017년 총선에서 집권 4기에 도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가 집권에 성공해 콜 총리의 16년 재임 기록을 깰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