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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밤중에 만해에게 독립자금 전달”

중앙일보 2015.09.18 01:06 종합 25면 지면보기
만공 선사(아래 가운데)가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충남 서산 간월암에서 시봉을 맡았던 수연 스님(아래 왼쪽)과 원담 스님(아래 오른쪽)이 도반들과 함께 스승 곁에 앉았다. [사진 수덕사]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 주석했던 만공(滿空·1871~1946) 선사의 숨겨진 독립운동 일화가 발굴됐다. 만공 선사는 조선의 억불(抑佛)정책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끊어진 선불교의 숨결을 되지핀 경허(鏡虛·1846~1912) 선사의 법제자다. 20일 오후 1시 수덕사에서 ‘일제강점기 만공 선사의 위상’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수덕사, 만공 스님 항일운동 재조명
간월암서 독립기원 천일불공도
경허 선사 제자 … 20일 학술대회



 1942년 만공 스님은 충남 서산시 간월도의 간월암에서 천일불공을 시작했다. 올해 90세인 견성암의 비구니 수연 스님은 동년배인 원담(수덕사 방장 역임·1926~2008) 스님과 함께 차 시중을 들며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했다. 수연 스님은 “‘우리 노스님(만공)이 실제 숨어 있는 독립운동가야. 총독부 회의가 있던 날과 선학원 고승 대회에 참석했을 때도 밤에 삼청공원의 은밀한 장소에서 한용운(1879~1944) 스님을 만났다. 우리 스님(만공)이 한용운 스님에게 독립자금이 든 봉투를 건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이야기를 원담 스님에게서 직접 들었다”며 숨겨진 일화를 증언했다. 그동안 이야기로만 떠돌다가 최근 ‘만공 선사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보훈처의 자료조사 과정에서 수연 스님의 새로운 증언이 공식적으로 나왔다.



 수연 스님은 “만공 스님은 일본 순사들의 접근이 어려운 바다 한가운데 외딴섬(간월도)을 골라 천일불공을 시작했다. 곁에서 내가 직접 봤다. 당시 대외적 명분은 ‘평화 기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기원하는 불공이었다”며 “만공 스님이 법문을 할 때도 ‘간절하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우리 절 근처에 많다. 우리 고장의 자랑인 유관순 열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독립의 날이 오리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1945년 8월 만공 스님이 천일불공을 마친 지 3일 만에 광복이 됐다.



 만공 스님이 1937년 3월 11일 일본의 미나미 조선총독 앞에서 목숨을 걸고 ‘할’(喝·불교에서 깨달음을 전하며 지르는 소리)을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전임 데라우치 총독의 공이 크다.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를 합하자”는 미나미 총독에게 만공 스님은 “전임 총독은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마땅히 무간 아비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을 것이다. 조선불교는 1500년 역사를 가졌다. 일본불교와 합할 필요가 없다”고 일갈했다. 옆에 선 일본 헌병이 칼을 뽑으려 하자 미나미 총독이 제지했다고 한다.



 학술대회 기조발제를 맡은 이은윤 전 금강불교신문 사장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만공 선사의 고차원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허만공선양회장 옹산 스님은 “당시 31본산 주지들 중 유일하게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이가 만공 선사였다. 1941년에는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주도해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대한 항거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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