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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언니들이 뿔났다

중앙일보 2015.09.09 11:16




[기획] 할리우드 언니들이 뿔났다

성차별에 반기를 든 여배우들



올해 초부터 많은 여배우가 할리우드 내 성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불만의 불씨가 처음 발화된 것은 지난 2월 개최된 제87회 아카데미시상식. ‘보이후드’(2014,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패트리샤 아퀘트는 수상 소감과 함께 “지금은 여성의 동일 임금과 평등권을 위해 싸울 때”라고 말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남녀 근로자의 임금 격차, 고용 불평등 등 여러 문제가 재조명되고 있다. 실제 할리우드의 성(性)차별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걸까.



지난 5월, 시민단체 미국자유인권협회(ACLU)가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14년 미국 흥행 성적 250위 안에 드는 할리우드 영화 중, 여성 감독의 영화는 7%에 불과했다. TV 드라마는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백인 남성 제작자가 전체 제작자의 69%를 차지했고, 여성은 거의 없었다. 이에 ACLU는 지난 5월, 미 정부에 할리우드 고용 현장에서 여성이 받는 불이익을 밝히는 조사를 공식 요청했다. 영화 산업 내 성차별을 다루는 웹 사이트 ‘여성과 할리우드(Women and Hollywood)’의 멜리사 실버스테인 편집장은 ‘여성은 작품의 리더가 되기 어렵다는 관념이 할리우드에 만연해 있다’고 현 고용 구조를 분석했다.



심지어 201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제니퍼 로렌스, ‘레 미제라블’(2012, 톰 후퍼 감독)의 주인공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톱 여배우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단 출연료부터 남자 배우에 비해 낮다. 2013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 조사에 따르면,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은 남자 배우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의 평균 출연료는 여배우 개런티 순위



5위 안의 수입을 모두 합친 수준이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사이에도 차별은 있다. 지난해 말, 미국 영화 제작사 소니 간부의 e-메일이 해킹당하면서 거대 스튜디오의 성차별적 개런티 정책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소니가 제작한 ‘아메리칸 허슬’(2014,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제니퍼 로렌스·에이미 애덤스·크리스천 베일·브래들리 쿠퍼·제레미 레너가 출연한 영화. 분량과 비중 면에서 남녀 배우 간에 별다른 차이는 없지만 개런티는 달랐다. 여배우 두 명의 개런티가 남자 배우들에 비해 각각 평균 2% 낮게 책정된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아카데미시상식 후보에 오른 로렌스가 후보에 오르지 못한 레너보다 몇 억 달러나 적은 출연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셈’이라고 꼬집었다.



샤를리즈 테론은 ‘헌츠맨’(2016년 개봉 예정, 세딕 니콜라스 트로얀 감독)에서 상대 남자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와 동일한 출연료, 1000만 달러를 받는다. 이는 촬영에 앞서 테론이 스튜디오를 설득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는 “여성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배우가 남자 배우보다 적은 개런티를 받는 이유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실버스테인 편집장은 ‘배우들은 제작비 운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불투명한 시스템 안에서 임금 차별 문제가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 내 불평등 문제는 작품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샌디에이고주립대 영화방송과 조사에 따르면, 2014년 흥행 성적 100위권 안에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단 12%뿐이다. 여성 제작자가 현저히 적고, 처우가 불평등한 영화 제작 환경에서 남성 중심적인 서사가 넘쳐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때문에 남성 의존적이거나, 성(性)적 대상으로만 그려진 여성 캐릭터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지적도 있다.



‘쥬라기 월드’(6월 11일 개봉, 콜린 트레보로우 감독)도 그 예다. 극 중 여주인공 클레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공룡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남자 주인공 오웬(크리스 프랫)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영화가 개봉되자 “할리우드가 또 하나의 성차별적인 블록버스터를 내놓았다”(USA 투데이)라는 평이 나왔다.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트위터에는 ‘(클레어의 여성상은) 70년대로 시계를 되돌린 듯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트레보로우 감독은 “모든 여성 캐릭터가 남자다운 강인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라고 해명했지만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2월 25일 개봉, 샘 테일러 존슨 감독)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솔직하게 담아내 호평을 받은 E L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올해 기대작으로 꼽혔다. 막상 영화가 공개되자, 여러 외신은 남자 주인공에 비해 여주인공의 나체가 훨씬 많이 등장하는 점, 남성의 시선으로 섹스신을 다룬 점 등을 비판했다. 심지어 여성 감독이 연출했지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화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캐릭터가 쏟아지면서 여배우들의 불만도 거세졌다. 액션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2001~)에 출연한 미셸 로드리게즈는 “몸이 헤프거나, 남자 주인공의 들러리거나, 성폭력을 당하는 여성 캐릭터는 연기하고 싶지 않다. 한데 이런 역할을 제외하면 할리우드에서 출연할 영화는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예 없던 건 아니다. 그중에는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둔 경우도 있다. 제니퍼 로렌스가 혁명을 이끄는 인물로 등장한 ‘헝거게임:모킹제이’(2014,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와 다재다능한 여성 영웅을 그린 ‘다이버전트’(2014, 닐 버거 감독)가 그 예다. 두 영화는 미국에서 각각 3억3000만·1억5000만 달러의 수입을 거뒀다.



올해는 이른바 ‘페미니스트 영화’로 불린 ‘매드맥스:분노의 도로’(5월 14일 개봉, 조지 밀러 감독)가 관객의 큰 사랑을 받았다. 전 세계에서 3억7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이 영화는 용맹한 여주인공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폭압적인 독재자 임모탄(휴 키스 번)에게 반기를 드는 내용이다. 샌디에이고주립대학교 마르타 라우젠 교수는 “이런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건, 관객이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어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영화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적다. 할리우드 산업 관계자들은 대중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여배우들의 말말말-



할리우드의 성차별 문제는 내가 연기를 처음 시작했던 20년 전에 비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빠졌다.

-영국 방송 ‘라디오 타임스’에서 엠마 톰슨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남성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더 이상 동종 업계의 남자와 다른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

-잡지 ‘엘르’에서 샤를리즈 테론



동료 남성 출연료의 10% 수준만 받고 있다. 여배우는 동등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서 아만다 사이프리드



글=윤지원 기자 yoon.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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