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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실성할 줄 아는 예술가

중앙일보 2015.09.09 11:29




[강유정의 까칠한 발견] 배우, 실성할 줄 아는 예술가



사회에서 ‘성실’은 꽤 좋은 의미로 통용된다. 특히 출퇴근 시간이 엄격한 직장 생활에 성실은 무척 중요한 자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무조건 성실한 게 능사는 아니다. 속된 말로 ‘유도리’(여유라는 뜻의 일본어 ‘유토리’에서 유래한 말)라고 부르는 융통성은, 어떤 점에서 성실과 거리가 멀다. 융통성은 적정한 순간 적당한 에너지를 부여하는 힘, 쉽게 말해 눈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눈치도 있으면서 성실한 사람. 바로 이 두 가지가 조직이 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성실과 눈치는 공존하기 어렵다. 대개 눈치가 빠른 사람은 눈치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성실한 사람은 눈치를 경시한다. 정직하게 정도를 걷는 성실한 사람에게 눈치 빠른 사람은 샛길이나 옆길을 찾는 반칙주의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눈치와 성실, 이 가운데 매달려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삶. 이게 바로 밥벌이 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일상일 테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가만큼은 성실하기보다 간혹 실성할 줄 아는 사람이 대접받는다. 여기서 예술가란 재능을 교환 가치로 쓰는 모든 직종의 대명사로서의 의미다. 성실은 예술가에게 재능을 보장해 주진 못한다. 아니, 재능 있는 예술가가 성실하면 좋지만 성실하다고 해서 재능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실성할 줄 아는 예술가의 대명사는 바로 배우다. 가면을 쓰고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은 종종 빙의에 비유되곤 한다. 남의 영혼에 내 몸을 맡기는 자가 무당이라면, 배우 역시 시나리오 속 인물에게 몸을 완전히 주는 사람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명배우이자 예술가다.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동시대에 활동하는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젊은 여배우로 고아성과 김고은이 떠오르는 맥락도 여기 있다. ‘은교’(2012, 정지우 감독)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고은은 단숨에 영화계의 갈증을 채워 주었다. 기꺼이 실성할 수 있는 여배우를 기다리던 한국 영화계에 그녀가 보여준 순진한 욕망은 단비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고아성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 역시 ‘괴물’(2006, 봉준호 감독)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하지만 여배우라기보다 아역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어울린다. 눈에 띄는 아역 배우야 많지만 그중에서 여배우로 성장한 경우는 얼마나 될까. 많은 관객은 고아성이 여배우로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쉽게 추측하지 못했다. 사춘기의 늪을 지나기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협녀, 칼의 기억’(8월 13일 개봉, 박흥식 감독, 이하 ‘협녀’)과 ‘오피스’(9월 3일 개봉, 홍원찬 감독)로 돌아온 두 사람을 보면, 역시 기대할 만한 배우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는 꽤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차이나타운’(4월 29일 개봉, 한준희 감독)에 이어 ‘협녀’까지 기대작에 출연한 김고은은 성실한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어쩐지 눈에 힘만 들어간 듯한 서운함을 부인할 수 없다. 열심히 노력 중인 것은 알겠으나 ‘차이나타운’의 일영과 ‘협녀’의 홍이는 옷만 다를 뿐 다른 인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반면 고아성은 눈 돌아가는, 말 그대로 미친 연기를 보여준다. 그가 연기한 ‘오피스’의 인턴 사원 미례는 칼자루를 휘두르는 갑에게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손아귀에 칼자루를 든, 고양이를 물어버린 쥐 그 자체다. 이 영화에서 고아성은 미친 연기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고아성과 김고은, 두 배우는 모두 소중한 한국영화의 자산이다. 하지만 데뷔하자마자 전폭적 신뢰를 얻어 줄줄이 차기작을 찍은 김고은에 대한 기대가 어쩌면 조급함은 아니었는지 우려된다. 반면 ‘괴물’ 이후 크고 작은 영화에 출연하다 20대 인턴 사원으로 돌아온 고아성. 그가 ‘괴물’에서 하수도 오물을 뒤집어 쓸 수 있던 건, 10대의 오기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재능이었음을 다시 알게 됐다. 성실하면서도 실성할 줄 아는 배우, 그런 배우가 진짜 배우다.





"고아성은 ‘오피스’에서 갑에게 전전긍긍하는 인턴 역을 맡아 미친 에너지를 뿜어낸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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