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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좌파 코빈 새 당수, 블레어 ‘제3의 길’ 버리나

중앙일보 2015.09.14 02:46 종합 10면 지면보기
지난 1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노동당 리더십 콘퍼런스 1차 경선을 통해 새 당수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앞줄 왼쪽)이 축하를 받고 있다. [런던 AP=뉴시스]


누구나 영국 노동당의 좌회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토록 급격한 좌회전이 될 줄 몰랐다. 12일(현지시간)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강성 좌파인 제러미 코빈(66)이 1차 투표에서 59.5%를 득표해 당수로 선출됐다. 42만2664표 중 25만1417표를 얻었다. 압도적 승리인 1994년 토니 블레어의 당선 득표율(57%)을 웃돈 성적이다.

1차서 59.5% 득표 예상밖 압승
긴축 반대, 철도·전기 국유화 주장
“노동당 232명 중 가장 왼쪽” 평가
의원 10명 “함께 일 못한다” 냉소



 경선 중반 이후 코빈의 당선은 기정사실화됐다. 반(反)긴축과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와 함께 이라크 전쟁에도 반대한,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되는 진정성이 돋보이면서다. 노동당을 떠났던 좌파와 노조주의자들 사이에 열풍이 불었다. 막판에 투표하겠다고 16만 명이 몰렸는데 대부분 코빈 지지자란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60%까지 득표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3파운드(약 5500원)를 내고 투표에 참여한 지지자들뿐 아니라 전통적인 당원들에서도 코빈이 앞섰다. 2위 득표율은 19%에 불과했다. 영국 언론들은 “논쟁의 여지 없는 승리”라고 평가했다.



 코빈이 경선에 뛰어든 6월 초만 해도 이를 예견한 이는 없었다. 후보 등록을 위해 의원 35명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선거 막판에야 채울 수 있었다. 일부 의원은 코빈을 지지하지 않는데도 “왼쪽의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며 선심 차원에서도 서명해줬다. 당시 도박업체들은 4명의 후보 중 코빈의 당선 가능성을 200대 1로 봤다.



 그는 노동당 내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1983년 런던 북부에서 당선된 후 32년 동안 내각은 물론 예비 내각에도 참여해본 일 없는 평의원이었다. 스스로는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한다. 이코노미스트는 “노동당 의원 232명 중 가장 왼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의원”이라고 평가한다. 긴축에 반대할 뿐 아니라 철도·전기·가스 국유화를 주장한다. 영국의 무료 의료서비스(NHS)처럼 교육도 그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외교안보에선 더 왼쪽이다. 핵개발운용체제인 트라이던트 현대화에 반대한다.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에 반대하지 않으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선 탈퇴해야 한다는 쪽이다. 영국이 북아일랜드에서 발을 빼 아일랜드가 통일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장 보수당 소속인 마이클 팰런 국방장관이 “안보에 심대한 위협”이라고 공격했다.



 83년 마이클 풋 노동당수가 좌클릭 플랫폼으로 총선을 치렀다가 마거릿 대처 전 총리에게 대패한 이후 노동당은 중도로 옮아갔다. 대표적 인물이 토니 블레어였다. 고든 브라운을 거쳐 전임 당수인 에드 밀리밴드 때에야 비로소 다시 왼쪽으로 이동했다. 밀리밴드 당수는 그러나 지난 5월 총선에서 참패했다. 전문가들은 “좌편향 정책도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동료 의원들이 코빈의 당선에 불안해하는 이유다. 예비내각에 있던 의원 10여 명이 코빈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외교장관을 지낸 잭 스트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고 했다.



 지지자의 열광 못지않게 의원들의 불안·냉소도 큰 상태란 얘기다. 이런 괴리가 노동당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내년 5월 지방선거를 계기로 노동당 내 내전이 벌어질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500차례 이상 당론에 배치되는 투표를 했던 코빈으로선 의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다.



 외신들은 이런 흐름을 좌파 진영에서 부는 세계적 반긴축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그리스에서 급진 좌파 시리자가 집권했고 스페인에서 포데모스가 당선 가능성을 높여가는 연장선상이란 얘기다. 무소속이나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그중 하나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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