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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어린이 마음속 상처, 3D 프린터가 약 됐죠

중앙일보 2015.09.14 01:39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기운·강제욱·하석준·임도원 작가로 구성된 ‘예술과 재난’ 팀(왼쪽부터). 네 사람은 지난달 일주일간 필리핀 타클로반에 갔다온 이후 각자의 분야에서 저마다 새로운 작품 활동들을 기획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타클로반 현지 아이들이 복원된 장난감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사진작가 강제욱]
해진 옷을 기워 입듯, 지난 8월 네 명의 예술인들이 본 필리핀 타클로반도 그런 모습이었다. 집 지붕에 구멍이 뚫린 곳은 현수막을 주워다가 막고, 무너진 건물은 굴러다니는 자재들을 모아 다시 지었다. 2년 전 태풍 하이옌(현지 이름 욜란다)이 휩쓸고 간 타클로반 사람들의 일상도 그렇게 기워진 것 같았다.

강제욱·신기운·임도원·하석준씨
태풍 휩쓴 타클로반 지역 어린이
부서진 장난감 갖고 노는 것 목격
팔 없는 인형, 바퀴 없는 차 고치자
웃음 짓고 춤까지 추며 활력 찾아



 사진작가 강제욱(38), 비디오 아티스트 신기운(39), 조각가 임도원(36), 미디어 아티스트 하석준(44)씨로 구성된 ‘예술과 재난(Art and disaster)’팀은 타클로반의 일상 속에서도 특히 ‘아이들’의 삶에 주목했다. 천재지변·전쟁 등 재난의 한복판에서 아이들은 모든 아픔을 짊어지고 꿈도 잃은 채 살아가야 하는, 네 사람이 봤을 때 가장 ‘가여운’ 존재였다.



특히 재난 현장의 사진들을 찍어온 강씨는 이를 절감했다. 강씨는 “사진 작업을 위해 지난 2년간 타클로반에 4차례 방문했는데 부서지고 망가진 장난감을 갖고 노는 현지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고 했다. 강씨의 눈에 부서진 장난감은 마치 아이들의 부서진 ‘꿈’처럼 보였다.



 강씨는 한창 3D 프린터에 매료돼 있던 임씨에게 전화를 걸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3D 프린터로 재난 지역 아이들의 부서진 장난감을 복원하자는 계획이었다. 3D 프린터의 의미 있는 활용을 고민하던 임씨는 단번에 수락했다. 동료 예술인 신씨와 하씨도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네 사람은 임씨가 설계한 3D 프린터 봇티스트(Botist)로 3D 프린팅 기술을 배운 뒤 직접 만든 프린터 3대를 들고 지난달 23일 타클로반으로 향했다.



 일주일간의 여정. 미리 준비한 계획은 없었다. 무작정 강씨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산 페르난도 센트럴 학교로 향했다. 학교 측은 이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곧바로 아이들에게 망가진 장난감을 받았다. 팔이 없는 바비인형, 바퀴가 빠진 자동차, 프로펠러를 잃은 비행기 등 고장 난 장난감들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가 전달됐다. 임씨는 “낮에는 3D 프린터 원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아이들이 직접 프린터를 체험해볼 수 있는 워크숍을 진행하고, 밤에는 넷이서 밤새 장난감을 고쳐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장난감을 보며 아이들은 더없이 환히 웃었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게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하씨는 “3D 프린터로 아이들 스스로 장난감을 만드는 시간이 있었는데 신이 났는지 한국 노래를 틀어놓고 춤까지 추더라”며 “정원이 차 워크숍에 참여하지 못한 아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부러운 듯 교실 안을 쳐다보곤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네 사람의 3D 프린터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덕분에 한 국립 고등학교 과학영재반 학생들에게도 3D 프린팅 기술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신씨는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가했다”며 "학생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교사들도 수업에 눈을 떼지 못했다”고 밝혔다.



 귀국 후 넷은 후속 프로젝트들을 조금씩 계획해나가고 있다. 당장 올해 말에는 지난 4월 지진 피해를 겪은 네팔 아이들의 장난감을 고쳐줄 생각이다.



임씨는 “앞으로 방문하는 지역마다 프린터를 한 대씩 기부해 현지 아이들과 3D 프린터로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며 “예를 들어 아이들이 모델링한 파일을 e메일로 보내면 그걸 한국에서 3D 프린터로 뽑아 보내주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더 많은 예술인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강씨는 “누군가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은 어쩌면 예술인들에게 가장 적합한 일일지 모른다”며 “온·오프라인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아이들의 꿈을 복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글=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3D 프린터=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만든 3차원 도면을 바탕으로 실물의 입체 모양 그대로 찍어내는 기계. 재료를 아주 얇게 쌓아가면서 물건의 형상을 만드는 적층형 제조 방식 등이 있다. 레이저 빔으로 미세한 금속 분말로부터 고형의 물체를 만들어 정확도가 상당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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