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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미국을 다루는 박정희의 칩과 박근혜의 칩

중앙일보 2015.09.14 01:13 종합 32면 지면보기
강찬호
논설위원
핵무기 만들지 말라고 주리를 튼다. 인권도 개선하라고 목을 조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체제 붕괴’ 시나리오를 흘린다. 미국의 북한 길들이기 방식이다. 그러나 1970년대엔 한국이 이런 방식으로 미국에 당했다. 79년 여름 서울에 온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앞에 ‘김대중…’으로 시작되는 재야인사 명단을 들이댄다. “당신이 부당하게 감금한 정치범들이오. 당장 석방하기 바랍니다.” 주권 국가 원수에게 이보다 더한 치욕이 있으랴.



 박정희 집권 18년은 미국과의 처절한 생존게임의 연속이었다. 박정희는 5·16을 일으킨 지 6개월 만에 존 F 케네디를 찾아가 월남 파병을 자진 제안했다. 좌익 경력을 의심하는 미국을 붙잡기 위한 승부수였다. 월남전이 본격화하자 박정희는 약속대로 30만 장병을 보내 5000명 넘는 피를 바쳤다. 미국의 입이 벌어졌다. 덕분에 박정희의 60년대는 승승장구였다.



 하지만 유신 독재로 접어든 70년대 상황은 달라진다. 월남전이 끝나 한국의 도움이 필요 없어진 미국은 ‘인권’이란 회초리를 꺼내든다. 박동선의 로비를 ‘코리아 게이트’로 부풀려 박정희를 코너로 몬다. 미국 관리들은 파티에서 한국 외교관을 만나면 외면하라는 엄명을 받는다. 더 큰 충격은 주한미군 철수 선언이다. 박정희에겐 “당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가 나간다”는 협박으로 들렸을 것이다.



 정권 붕괴의 공포 속에 박정희는 프랑스에서 도입한 기술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다. 78년엔 사거리 180㎞의 유도탄 백곰의 시험발사에도 성공한다. 미국엔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자행하는 북한과 똑같이 보였을 것이다. 카터가 “더 나가면 동맹이 끝장날 것”이라고 경고하며 서울을 떠난 뒤 넉 달 만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절명한다.



 이런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이다. 국익을 위해선 친구도 가차 없이 버리는 미국의 냉혹함을 뼛속 깊이 체험한 드문 지도자인 것이다. 일본도 호주도 못 간 중국 전승절에 박 대통령만이 유일하게 참석한 것도 그런 체험에서 우러나온 리얼리즘 미국관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피에는 친미도 반미도 아닌 용미(用美)가 흐른다. 국민적 동의 없이 ‘동북아 균형자’ 외교를 시도했다가 망한 노무현과 달리 박 대통령의 균형외교는 순항을 지속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가 높은 데다 경색된 북·중 관계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은 이제부터다. 박 대통령은 당장 다음달 중순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를 만나 ‘중국경사론’ 의혹을 풀고 한·미 관계를 리부트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칩이 필요하다.



 아버지 박정희는 핵을 칩으로 삼으려 했다.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핵무기를 개발해 북한을 억지하고 미국에 발언권을 가지려 한 것이다. 남한판 핵·경제 병진정책이었다. 물론 이는 완벽히 실패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칩은 무엇일까. 당연히 핵은 아니다. 그러면? 북한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해 북한의 핵동결과 개혁·개방을 유도하면 미국은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도 우리가 주도하는 동북아 구도에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된다. 오바마도 머리 좋은 사람이니 이런 논리를 이해하고 지지해줄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중국이 중요해도 한·미 동맹을 초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대국을 곁에 둔 소국은 또 다른 대국을 끌어들여 균형을 유지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칙도 소국이 칩을 가졌을 때만 적용된다. 효용가치가 없으면 가차 없이 대국들의 빅딜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캐나다는 소국의 생존 비결을 보여주는 교과서다.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 레스터 피어슨 캐나다 총리에게 월남전 파병을 요청하자 피어슨은 거부했다. 격분한 존슨은 피어슨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럼에도 캐나다는 미국의 최우방으로 남았다. 월남전을 반대하면서도 뒤로는 CIA의 월남전 첩보활동을 돕고 군수물자를 지원한 처신 덕분이었다. 우리도 중국과 잘 지내면서도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북한을 슬기롭게 관리해 통일한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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