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최동원의 갈매기 주름

중앙일보 2015.09.14 00:02




















































4년 전 9월 14일이었다.

눈 뜨자마자 접한 뉴스에 한동안 넋을 놓았다.

한국야구의 전설, 최동원 감독의 부고였다.



워낙 그의 팬이었다.

흔히 ‘부산은 최동원을 낳았고, 최동원은 부산팬을 낳았다’고 한다.

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산은 최동원을 낳았고 최동원은 야구팬을 낳았다’고 해야 마땅하다.

부산 사람이 아니면서 그를 보며 야구팬이 되었기에 그리 주장하고 싶다.



야구를 잘 모르던 시절, 우연히 ‘한미 대학야구’를 TV로 보게 되었다.

약간 삐딱한 모자, 금테 안경의 투수는 거침없이 공을 던졌다.

속이 다 시원해지는 투구였다.



어쩌다 홈런을 맞기도했다.

그런데 그 투수는 또 쳐보라며 같은 코스로 공을 던졌다.

그가 바로 최동원이었다.

그날부터 지독한 야구팬이 되었다.



2008년 6월 25일 그를 만났다.

장소는 김해시 롯데 상동구장, 서울에서 차로 내달리며 내내 설렜다.



상동에서 만난 그는 언제나처럼 짧은 머리였다.

가느다란 테에 최동원이란 이름이 적혀있는 특유의 금테안경도 한결같았다.

그런데 유니폼은 낯설었다. 한화 이글스 유니폼이었다.



당시 그는 한화 2군 감독이었다.

더구나 등번호가 75번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등번호는 롯데의 11번이었다.

75번의 한화 유니폼을 입고 하필이면 롯데구장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부산야구의 상징,

아이러니했다.



인터뷰는 야구장 입구의 간이 테이블에서 이루어졌다.

연습 중인 선수들에게 지장을 주지 않으려 야구장 바깥에 자리를 잡은 게다.

처음엔 파라솔 아래에 자리 잡았지만 6월의 땡볕이 어느새 그의 얼굴에 내리쬐었다.

조금만 옮기면 햇볕을 피할 수도 있건만 인터뷰 내내 땡볕 드는 자리를 지켰다.



인터뷰어는 ‘시골의사’로 알려진 박경철씨였다.

당시 중앙일보에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질문은 말 그대로 직격이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야구 인생을 되짚어 보고 속내를 들어보기 위한 질문들이었다.



팀과의 불화, 선수협 파동, 트레이드, 메이저리그 진출 실패, 사업 실패 등 다소 껄끄러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2008년 7월 4일자 중앙일보 기사 참조>



그는 답을 피해가지 않았다.

답을 하며 가슴을 치거나 부여잡은 게 수십 번, 그만큼 응어리진 게 많았음이다.

그가 말했다.

“제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어요. 가슴을 태우는 그런 불덩어리요. 아직도 그게 남아 있습니다.”



다시 부산에서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부산은 내 고향이고 뿌리입니다. 어머님이 계시고, 나를 만들어 준 곳이죠. 늘 훈훈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화 사람입니다,”



이어 경기수첩을 꺼내 보여주며 덧붙였다.

“최고의 선수였다고 최고의 지도자는 아닙니다. 선수시절의 생각을 가지고 가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지금은 지도자의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연습생인 셈입니다.”



‘지금은 한화 사람’, ‘지금은 지도자 연습생’이란 말 중, ‘지금은’을 몇 번 강조했다.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생전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 대신 지금은 동상으로 사직구장에 서있다.

그의 등번호 11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돌아오기 전 찍은 사진을 몇 장 보여줬다.

“이마 주름은 갈매기 형상이구요. 눈가 주름은 갈매기 날개같구요. 심지어 말할 때 입술 모양도 갈매기 모양이네요.”



그것을 보며 그가 활짝 웃었다.

영락없는 갈매기 주름이었다.

갈매기 주름 짙은 그 웃음이 떠오르는 오늘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