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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사람이 떠나면 차는 식는가

중앙일보 2015.09.09 00:41 종합 3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국산 영화 ‘베테랑’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극 중의 명대사 또한 인기다. 형사 서도철이 동료 형사에게 던진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이 널리 회자된다. 필자에겐 오히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된다”는 재벌 3세 조태오의 대사가 귀에 남는다. 이 말은 조정래의 소설 『정글만리』에 나온다. 중국 정부의 원칙 없는 애매한 일 처리를 꼬집을 때 쓰였다.

원로의 임무란 후계자 잘 뽑은 뒤
업무 넘기고 미련 없이 떠나는 것



 중국에도 최근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대사 하나가 있다. ‘사람이 떠나면 차는 식는다’는 ‘인주차량(人走茶凉)’이 그것이다. 1960~70년대 큰 성공을 거뒀던 경극(京劇) ‘사자방(沙家浜)’에 나오는 말이다. 갈대숲이 울창한 장쑤(江蘇)성의 사자방이란 곳에서 중국 공산당 신사군(新四軍)과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위대한 항일 투쟁의 역사를 써 나간다는 게 주요 줄거리다. 한데 족히 반백 년은 됐을 이 경극의 한 대사가 왜 현대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지난달 ‘변증법적으로 인주차량을 보자’는 글을 실은 게 원인이다. 이 칼럼은 이후 여타 중국 매체에 대서특필되며 국내외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바람 잘 날 없는 중국 정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주차량은 원래 자연적인 현상이다. 사람이 떠나면 그가 마시다 남긴 차는 식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뜻은 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하며 따르다가 권세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푸대접하는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세상 인심을 한탄하는 것이다. 중국 정가에서 널리 쓰인다. 한때 중국의 높은 자리에 올랐던 한 영도인이 그 직책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키운 후배에게 배척당하면 그 섭섭함을 ‘인주차량’ 운운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중국은 관료 승진에 있어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람됨을 더 중요하게 본다. 한데 인주차량 운운의 말을 듣게 되면 그는 사람됨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물 마실 때 우물을 판 이의 노고를 잊지 말라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의 기본적인 정신조차 갖추지 못한 불합격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큰 인물이 되기는 틀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국 정치는 줄곧 선대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전진하는 모양새였다. 전임자를 부정하고 올라서는 한국 정치와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민일보 칼럼은 사람이 떠나도 차는 계속 뜨거운 인주차열(人走茶熱)이 돼선 안 되고 사람이 떠나면 차는 마땅히 식어야 한다는 인주차량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란 어떤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 자리에 걸맞은 책임과 권한을 갖고 일을 도모하게 된다(在其位 謀其政). 따라서 자리에서 물러난 영도인은 이제 더 이상 권력과 의무 또한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퇴직 간부가 개입하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에서라고 칼럼은 말한다. 하나는 현직을 떠남에도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권력욕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친지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이는 한마디로 부패 행위란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일보가 겨냥하는 퇴직 영도인은 누구인가. 즉 인주차량의 인(人)이 누구냐는 이야기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가리킨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쩌민은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10년 내내 막후 권력을 행사했다. 후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주고도 2년을 더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군부 건물인 8·1빌딩에 계속 자신의 사무실을 유지하며 중요 정치 사안에 개입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늙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면(老而不退) 장쩌민은 퇴진하고도 쉼 없이(退而不休) 정치에 간여해 온 것이다. 문제는 장쩌민이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 부주석과 함께 오늘의 시진핑(習近平)을 있게 한 인물이지만 시진핑 정권 들어서도 간섭이 지속돼 마침내 이번 인민일보의 칼럼과 같은 경고를 받게 됐다는 점이다.



 시진핑은 이제까지 중국의 발전은 개혁을 추진한 데 있었으며, 현재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개혁을 단행할 때 생겨난 기득권 세력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으며, 중국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선 개혁을 심화해 이 기득권 세력을 부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많은 경우 이 기득권 세력이 바로 장쩌민과 연결돼 있는 것이다. 부패 혐의로 낙마한 쉬차이허우(徐才厚)와 궈보슝(郭伯雄) 두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 모두 장쩌민의 군권을 떠받쳤던 인물이다.



 결국 시진핑과 장쩌민의 충돌은 개혁 세력과 반(反)개혁 세력의 다툼으로 귀결된다. 시간과 민심은 시진핑의 편으로 보인다. 장쩌민은 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이후 혼란한 중국 정국을 잘 수습해 오늘의 발전에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내년에 90세를 맞는다. 덩샤오핑(鄧小平)은 과거 원로(元老)의 첫 번째 임무란 “후계자를 잘 뽑아 그들에게 업무를 넘기는 것”이라 강조했다. 현재 장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조언이다.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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