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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NIE] 팬덤의 변화…오빠부대에서 대중문화 생산자로

중앙일보 2015.09.09 00:02 Week& 6면 지면보기
1980년대 조용필, 90년대 서태지…그리고 지금의 엑소까지 스타의 성장엔 항상 팬들이 함께 했다.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팬덤(fandaom)은 대중문화를 읽는 키워드다. 한국에서 팬덤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조롱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신세대 문화의 대변자로 인식되기도 했다. 최근 팬덤은 대중문화 소비의 적극적인 주체로 거듭났다. 대중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다양성을 부여하는 긍정적 역할자로 주목받기도 한다. 교과서와 언론, 각종 연구자료에 기초해 팬덤 문화의 의미를 되짚어봤다.









10대 일탈로 치부되던 팬 문화



팬덤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으로 긍정보단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한국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팬 문화는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9년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에서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여성 팬들은 한국 ‘오빠부대’의 시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공연은 당시 한국 사회 기성세대들에게 팬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연 분위기에 취한 한 여대생이 자신의 속옷을 벗어 무대로 던지는 장면은 가부장적이고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커다른 충격으로 다가갔다. 80년 미국 가수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에선 흥분한 관객들에 의해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수십 명이 졸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때 해외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이 정부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기성세대들에게 팬덤에 대해 무절제하고 부도덕하며 반사회적이면서 퇴폐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청소년 팬덤은 일탈의 상징으로 굳어졌고, 기성세대는 팬덤을 ‘청소년기의 반항’ ‘혼란’ ‘10대의 환상’ 등 규제와 선도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팬덤 문화의 지형을 바꿔놨다.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촉매 역할을 했다. 조용필이 80년대 젊은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했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기득권을 향한 젊은이들의 ‘반항심’을 자극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중문화의 중심축을 10대로 옮겨 놓았다.”(중앙일보 2015년 9월 5일 ‘조용필 사진 담긴 엽서→서태지의 열쇠고리→H.O.T. 우비→엑소 이어폰…스타 바뀌어도 팬심은 영원’)



서태지는 입시 경쟁과 획일화된 교육에 지친 10대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로 부각됐다. 서태지의 등장은 대중문화와 팬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팬덤의 형성에 대해 청소년의 시각과 입장에서 바라본 다양한 연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론은 한국 팬덤 문화의 형성에서 10대 소녀 팬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배경에 주목한다. “아직 본격적인 연애가 혀용되지 않는 10대에게 아이돌 스타들은 대리연애의 상대인 동시에, 이상화된 자기라는 측면이 강하다…많은 문화연구자들은 10대 소녀들이 열광적 팬덤의 주체가 되는 것을, 사회적 약자로서 10대 소녀라는 위치와 그들을 둘러싼 경쟁적 환경에서 찾았다. 숨막힐 듯한 현실의 탈출구로서 10대 소녀 팬덤이다.”(중앙일보 2009년 4월 10일 ‘양양의 컬처코드 ⑮ 10대는 왜 가수에 열광할까’)



 

스타 추종자에서 스타 만드는 팬으로



서태지의 뒤를 이어 H.O.T., 젝스키스, 핑클, SES 등 1세대 아이돌 그룹의 탄생은 팬덤 문화의 저변을 확대했다. 조직적인 응원문화가 등장했고, 공식 팬클럽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됐다. 대형 콘서트장 관객석을 가득 메운 풍선은 아이돌 그룹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이 됐다.



2000년대 들어 팬덤 문화는 좋아하는 연예인의 ‘지지자’ 역할을 넘어 적극적으로 팬덤 대상을 보호하고, 변호하며, 스타의 성공을 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을 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한다. 10~20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팬덤 문화는 삼촌팬·누나팬 등 30~40대층까지 퍼졌다. 경제적 구매력을 갖춘 30대 이상 팬덤은 스타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고, 그들을 위해 기념숲을 조성하는 등 스타의 대중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스타를 따라 팬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팬이 스타를 만드는 시대다. “팬들이 대중문화 콘텐트를 소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스타를 직접 만드는 데 참여한다. 스스로 콘텐트를 만들고 즐기는 이른바 ‘생산자적 소비자’ 개념이다. 미디어와 대중이 문화권력을 나눠 갖는 시대다.”(중앙선데이 2012년 1월 1일 ‘팬덤 전성시대…팬클럽, 원하는 스타 직접 만든다’)



 

팬픽·팬아트…새로운 대중문화 생산



미디어 학자 헨리 젠킨스는 저서 『텍스트 밀렵자들』에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대중문화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생산자로서 팬덤을 고찰한다. 생산에 참여하는 소비자를 뜻하는 프로슈머(prosumer)로서의 팬덤에 대한 분석이다. 프로슈머는 시장에 나온 물건을 선택해 소비하는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능동적 소비자를 말한다.



헨리 젠킨스는 “팬들이 스타 또는 캐릭터, 작품 원작을 재해석하고 변형해 창조한 팬 제작물은 팬에 의해 재해석되고 창조된 새로운 대중문화”라고 설명한다. 스타를 가상의 주인공으로 삼거나 원작의 배경을 빌려와 창작한 픽션 소설인 팬픽, 팬덤 대상과 관련된 회화·일러스트레이션·사진 등 팬아트와 같은 팬들의 제작물은 대중문화에 새로운 상상력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에 따르면 팬덤은 단지 스타에게 열광하는 것을 넘어서 스타의 이미지를 재해석하고, 독창적인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적극적·능동적 문화 수용자다.



언론도 팬 제작물의 긍정적 역할에 주목한다. “팬들이 쓰고 소비하는 팬픽은 특히 10대 소녀들의 억눌린 성적 욕망을 투사하는 10대들의 하위문화 형태로 나타난다…단순히 10대용 야한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엔 뛰어난 문학성과 극적 재미를 갖춘 작품도 많았다. 일부는 공식 출판되기도 했다…팬픽 시장은 곧 인터넷소설·로맨스소설 시장으로 이어졌다.”(중앙일보 2012년 8월 27일 ‘세상을 바꾸는 ‘팬픽’’)



교과서는 하위문화로서 팬덤 문화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하위문화란 한 사회 구성원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전체 문화와 달리 한 사회 내의 일부 구성원들만 공유하는 문화를 일컫는다.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는 “하위문화는 해당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소속감이나 연대 의식을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전체 문화에 다양성을 부여하여 문화의 창조와 변화에 기여하기도 한다”고 적고있다. 다양한 하위문화의 공존은 한 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교과서는 “우리 사회에 다양한 하위문화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사회 성원들은 자신들의 의견·희망·신념을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얻기도 한다. 하위문화가 한 사회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다양한 의견을 가진 구성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글=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자문=서울 동북고 권영부 수석 교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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