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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한국, 또 환율전쟁 희생양 되나

중앙일보 2015.09.08 00:02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철호
논설실장
환율이 경제적으로 결정된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한때 ‘협조개입’이란 표현이 있었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미국은 달러를 풀고, 반대로 일본은 엔화를 사들여야 했다. 이름은 ‘협조’지만 사실상 의무였다. 미국이 인위적으로 일본의 팔을 비튼 것이다. 엔화 가치는 달러당 240엔에서 88년 120엔으로 급등했다. 강대국에 환율은 세계 전략의 중요한 무기다.



 지난주 전 금융위원장 A씨를 만났다. 뛰어난 국제금융통인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이 어른거리는 조짐이다. 이번엔 중국을 겨냥하는 것 같다.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은 일본이 엔화 환율을 끌어올리도록 아베노믹스를 허용했다. 지금 중국은 성장률 하락과 증시 추락으로 발목이 잡혀 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중국은 더 궁지에 몰린다. 미·중이 환율 신경전을 넘어 본격적인 샅바 싸움에 들어간 분위기다.”



 전 세계에 유령처럼 ‘9월 위기설’이 떠다니고 있다. 다음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지각변동의 진원지다. 12월보다 이번에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FOMC 내 비둘기파는 미 인플레가 2%에 못 미치고 중국 증시 폭락으로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매파들이 내세우는 금리 인상 이유는 차고 넘친다. 우선 미국의 2분기 성장률이 3.7%나 되고 8월 실업률은 5.1%로 떨어져 ‘완전고용’이나 다름없다. 막강한 애플·구글·페이스북 등이 세계 IT시장을 휘젓고, 미국은 셰일가스 덕분에 에너지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리먼 사태 이후 풀린 4조 달러의 유동성과 제로금리가 언제 자산 거품을 만들지도 모른다.



 미국이 금리를 올려도 유럽과 일본에는 양적완화·제로금리라는 방파제가 있다. 이에 비해 실물·금융이 모두 위축 중인 중국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예방주사를 놓는 차원에서 연이어 금리와 지급준비율을 낮추고 외국자본 이탈을 막기 위해 선물환 거래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끼리 싸움에 밟혀 죽는 것은 언제나 풀이다. 달러 강세와 국제 원자재값 폭락으로 이미 러시아·브라질·중동 경제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언제 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가 다음 차례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



 미국이 얼마나 금리를 올릴지 장담하기 어렵다. 미 연준의 피셔 부의장은 “연준의 법적 목표는 미국 경제를 위한 경제 용어로 정의돼 있다”고 잘라 말했다. 국제경제는 참고사항일 뿐 미국 경제만 보고 금리를 올리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의 금리 인상에 반대했지만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미국은 섬뜩했다. 94~95년에 기준금리를 3%포인트, 2004~2006년엔 4%포인트를 확 끌어올렸다. 자신의 의지가 시장에 먹혀들 때까지 눈 딱 감고 올렸다. 미 금융가의 배후세력인 투자은행들도 은근히 금리 인상을 압박하고 있다. 시장 변동성이 커져야 돈을 벌기 때문이다.



 한국은 사면초가 신세다. 덩달아 금리를 올리자니 1100조원의 가계부채가 문제다. 현재 3.43%인 가계대출의 평균 금리가 2%포인트만 튀어도 137만의 한계가구(금융부채가 금융자산 초과)는 벼랑 끝에 몰린다. 그렇다고 저금리를 고집하면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 증시와 채권시장이 쑥대밭이 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원화 가치가 달러당 1300~1500원까지 곤두박질하는 극약처방이 남아 있다. 하지만 “또 수출대기업만 챙기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미국이 우리의 경상수지 흑자를 빌미로 원저(低)를 용인할지 의문이다.



 지난 50년간 심각한 ‘달러 강세-엔 약세’가 3번 있었다. 항상 한국에 끔찍한 내상을 남겼다. 89년엔 3저 호황이 부서졌고, 97년에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2006년엔 간신히 중국 특수로 버텼지만 이제 4번째 쓰나미가 덮치고 있다. 험악한 세계 환율전쟁의 너울에 한국호(號)의 평형수는 충분한지 모르겠다. 소극적인 통화정책, 초점 없는 재정정책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강대국 파워게임에 우리는 너무 자주 희생양이 됐다. 이대로 가면 또 환율·금리가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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