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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87> 가톨릭 성지순례 명소 스페인

중앙일보 2015.09.07 00:38 경제 8면 지면보기
백성호 기자
지난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이다. 영화 ‘미션’에 등장했던 신부들도 모두 예수회 소속이다. 이 예수회의 뿌리가 스페인에 있다. 덕분에 스페인은 대표적인 가톨릭 성지순례 장소로 꼽힌다. 예수회뿐만 아니다. 가톨릭 영성사에 수시로 등장하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도 스페인 출신이다. 요즘은 산티아고 순례길로 인해 스페인은 더 인기다. 영성의 땅, 스페인을 순례해보자.


아빌라엔 수도원 개혁 외친 데레사 수녀의 생가

올해 데레사 수녀 탄생 500주년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 초상화. [백성호 기자]
1500년대 스페인은 봉건사회였다. 당시 수도원은 매너리즘에 젖어 있었다. 귀족의 자녀가 수도원에 입회할 때는 거액의 기부금을 내야 했다. 또 세속에서 거느리던 하인들을 데리고 수녀원에 들어가 생활했다. 청빈, 절제, 노동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읜 아빌라의 데레사(1515~82) 수녀는 조숙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았을 정도였다. 데레사 수녀는 18세에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기대했던 수도원 생활과 거리가 있자 그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했다. 한겨울에도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생활할 만큼 ‘청빈’을 중시했다. 데레사 수녀는 여성의 몸으로 중세시대에 ‘수도원 개혁’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반발은 거셌다. 당시 수도원은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이었다. 반격이 날아왔다. “데레사 수녀가 젊은 수녀들을 뱃사람들에게 팔아 먹는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그에 대한 투서가 교황청으로 날아들고 데레사 수녀는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겨울에도 맨발로 생활 … 청빈 중시



데레사 수녀 시절에 사용했던 십자가와 편지. [백성호 기자]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성의 대외활동이 쉽지 않던 시절, 그는 ‘편지’를 통해 반개혁에 맞섰다. 뜻이 통하는 곳곳의 실력자들에게 상황에 따라 편지를 보내 설득하며 일종의 ‘편지 정치’를 펼쳤다. 수도 생활을 통해 터득한 깊은 통찰과 직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맨발의 가르멜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수도회로 인정을 받았다.



 맨발의 가르멜회는 봉쇄수도원이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다. 죽어서도 수도원 안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묵상과 노동과 기도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그리스도에게 봉헌한다. 데레사 수녀 당시에는 봉쇄수도원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세상에 대한 정화 기능을 했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고 북서쪽으로 85㎞ 떨어진 아빌라로 갔다. 고성(古城)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아름다웠다. 성문으로 들어가 골목들을 돌 때마다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옛 풍경’이 나타났다. 데레사 수녀의 생가(生家)는 수도원의 박물관이 돼 있었다. 그 옆에는 ‘생가 성당’이 있었다. 올해는 데레사 수녀의 탄생 500주년이다.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아빌라 방문’을 공식 요청했지만 아직 답은 듣지 못한 상태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봉쇄수도원



데레사 수녀가 생활했던 시대를 재현한 엔카르나시온 수녀원의 부엌(사진 왼쪽), 엔카르나시온 수녀원 뜰. 둥근 원들 안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둥근 원은 영성 수련의 단계를 상징한다(사진 오른쪽). [백성호 기자]


 생가에서 나와 엔카르나시온 수녀원으로 갔다. 데레사 수녀가 생전에 수도생활을 한 곳이다.돌들이 바닥에 깔린, 수백 년은 됐을 법한 길을 밟으며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둥근 원이 겹겹이 그려진 뜰에 섰다. 한가운데 십자가가 있었다. 문을 하나씩 열며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영성의 길을 형상화한 풍경이었다. 십자가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 새 소리가 들렸다. 바람도 울었다. 500년 전에도 그랬을 터이다. 데레사 수녀는 이곳에 서서 수없이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데레사 수녀는 생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하라 하시건만, 우리의 뜻은 거짓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뜻은 영원한 것을 사랑하라 하시건만, 우리는 이승에서 다함 있는 것을 찾습니다. 당신은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사랑하라 하시건만, 우리는 이승의 낮고 낮은 땅의 것을 사랑합니다. 또 당신은 오직 확신을 사랑하라 하시건만, 우리는 미심쩍은 것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지만 신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새 소리와 바람 소리, 그 모든 흘러가는 소리의 바탕에 깃든 ‘신의 음성’을 데레사 수녀는 듣지 않았을까. 일상의 모든 풍경, 일상의 모든 소리, 일상의 모든 만남 속에서 그는 ‘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데레사 수녀는 6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1617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데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데레사 수녀의 저서로는 『완덕의 길』 『영혼의 성』 『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상』 등이 있다.





로욜라는 예수회 만든 이냐시오 성인의 고향



바스크 출신의 귀족이자 기사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 성인. [백성호 기자]
스페인 남부는 뜨겁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에 밀이 익는다. 쨍하게 태양이 내리쬔다. 북부는 다르다. 푸른 산이 있고, 울창한 숲이 있고, 가는 곳마다 ‘초록’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예수회의 모체가 되는 수도원은 북부의 로욜라에 있다. 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1491~1556)의 고향이다. 로욜라에는 ‘푸름’이 가득했다. 명상과 묵상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젊은 이냐시오는 ‘잘나가는 남자’였다. 바스크 출신의 귀족이자 기사였다. 궁정을 드나들 만큼 성공도 했다. 당시 베스트셀러는 기사들의 무용담을 다룬 ‘기사 소설’이었다. 귀족 여성들도 기사 소설을 읽으며 로맨스를 꿈꿀 정도였다.



 이냐시오의 꿈은 1521년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프랑스와의 팜플로나 전투에 참전했다. 마지막까지 투항하지 않고 성(城)을 지키며 싸웠다. 그의 곁에서 포탄이 터졌고, 그의 무릎뼈는 박살났다. 결국 포로가 됐다. 프랑스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한 그의 기사 정신을 높이 사서 풀어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냐시오는 목숨이 걸린 외과수술을 수차례 받았다. 결국 다리를 절어야 했다.



 그는 절망했다. 병상에서 회복 중이던 그는 책을 두 권 만났다. 그리스도에 대한 책이었다. 바깥을 향해 내달리던 그의 눈은 서서히 내면으로 돌아섰다. 회복 중에는 성모를 만나는 환시도 있었다고 한다. 이냐시오는 길을 떠났다. 순례의 길이었다. 절망의 나락, 그 어둠의 끝에서 그는 빛을 찾아 발을 뗐다.



 몬트세라트의 바위산을 지나 작은 마을 만레사로 갔다. 이냐시오는 입고 있던 갑옷과 기사의 칼을 내려놓았다. 대신 넝마 자루를 옷 대신 걸쳤다. 그의 거처는 동굴이었다. 이냐시오는 아직 성직자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혼자 수도 생활을 했다. 하루 7시간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눈곱만큼이라도 마음에서 죄가 보이면 근처의 신부를 쫓아가 고해성사를 했다. 음식은 마을에 내려가 탁발로 해결했다. 그만큼 철저했다.





수도 생활 만레사 동굴앞엔 성당



예수회의 총본원이 오른편에 보이는 스페인의 로욜라. [백성호 기자]


 그 동굴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지금은 동굴을 안고서 성당이 세워져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 스페인 여성이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동굴 안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냐시오 성인도 그런 침묵을 안고 기도를 했을 터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게 나와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그게 왜 나의 죄를 대신해서 못박힌 게 되느냐고. 이냐시오의 물음도 비슷했지 싶다. 그는 동굴에서 10개월 넘게 묵상하고 수도하며 ‘대속(代贖)’의 의미를 되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신은 자비와 은총으로 이미 모든 죄를 용서했음을 말이다. 이냐시오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는 그걸 “꿈에서 깨어났다”고 표현했다. 꿈에서 깨어난 이냐시오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결심했다. 당시 이스라엘 은 이슬람 교도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성지순례가 가능했다. 이냐시오는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 성지에 도착했다. 예수의 삶, 예수의 자취를 더듬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숨진 골고타 언덕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꾸리는 성묘교회가 있었다. 이냐시오는 거기서 정식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 혁신 나서



이냐시오 성인의 탄생지인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예수회 본원 성당의 내부(사진 왼쪽), 이냐시오 성인이 하루 7시간 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만레사의 동굴(사진 오른쪽). [백성호 기자]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이냐시오는 사람들에게 묵상과 깨달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성직자 신분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몇 번이나 불려가 심문을 받았고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무죄로 풀려난 그는 결국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중세 스페인의 가톨릭 풍토는 그의 자유로운 영성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이냐시오는 스페인 대신 프랑스 파리에 가서 신학 공부를 했다. 파리는 자유롭고 열린 토론이 가능한 학풍이었다.



 이냐시오는 1539년 예수회를 조직했다. 1540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다. 당시는 개신교에 의한 종교개혁 열풍이 유럽을 휩쓸 때였다. 이냐시오는 로마로 가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 내부의 자발적 개혁을 촉진하는 일을 했다. 이냐시오는 1556년에 선종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09년에 이냐시오를 복자로 선포했고,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저서로 『영신수련』 『회칙초안』 등이 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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