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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화려한 수사보다 이행이 중요하다

중앙일보 2015.09.07 00:32 종합 33면 지면보기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남과 북이 ‘8·24합의’를 도출함으로써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 지난 7년여 동안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켜켜이 쌓인 갈등에너지가 무력충돌로 표출되느냐, 아니면 대화국면을 여는 에너지로 작용하느냐의 갈림길에서 다행히도 충돌을 피하고 대화국면을 열었다.



 남과 북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비롯한 모든 물리적 자산을 총동원한 가운데 43시간 동안 이뤄진 협상이 타결됨으로써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는 대치국면을 풀고 대화국면으로 전환됐다. 이번 남북 담판은 과거에 찾아보기 어려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남북 분단사에서 휴전협상 이후 처음 군사력을 총동원한 가장 긴박한 협상이었다. 남과 북이 군사력을 비롯한 모든 자산을 총동원한 가운데 전쟁과 대화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벼랑 끝 협상을 진행해 극적으로 전쟁을 피하고 대화의 문을 열었다. 남과 북 사이에 막대한 피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데 대해 공감대가 이뤄졌던 것이다.



 둘째, 도발의 주체를 명시하고 사과를 받아낸 첫 남북 합의문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북한이 1968년 1·21사태에 대해 ‘미안한 사건’, 96년 강릉 잠수정 침투 사건에 대한 ‘깊은 유감’, 2002년 제2연평해전에 대한 ‘유감’ 발표 등이 있었지만 간접 사과 또는 주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유감 표명에 그쳤다. 하지만 이번 지뢰 도발에 대해서는 사과 주체를 분명히 하고 재발방지를 강제할 수 있는 내용까지 공동보도문에 명문화했다. 이로써 도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셋째, 우리 국민의 달라진 안보의식과 단합이 남북 협상에서 우리가 원칙을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됐다. ‘신안보세대’로 명명된 2030세대의 북한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 의지와 전역까지 미루고 북의 도발에 맞서겠다는 행동은 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북한의 도발에 강한 대응을 주문한 것도 협상력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넷째, 김정은 정권의 협상 행태를 살펴보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도력을 시험해본 협상이었다. 김정은 체제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고모부 장성택과 군부 실세 현영철을 처형하는 등 ‘공포정치’를 목격한 우리로서는 김정은이 대남정책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협상을 통해 김정은도 선대 지도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협상 행태를 보였고, 무모한 정면대결은 피할 줄 아는 ‘북한식의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번 북한의 도발과 협상 과정에서는 전형적인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구사됐다.



 북한은 추가제재를 불러올 핵실험이나 장거리 로켓 발사 같은 고강도 도발이 어려운 조건에서 지뢰와 포격 도발 같은 저강도 도발로 위기를 조성하고 전쟁이냐 대화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벼랑 끝 전술을 편 끝에 대화국면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북한의 전통적인 협상전술인 ‘충격요법을 통한 국면전환’을 이번에도 그대로 재연했다.



 8·24합의에 대해 일각에서 불만을 표출하지만 충돌 일보직전의 대결국면을 대화국면으로 전환하고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북한의 지뢰 도발과 포격 도발에 대한 시인, 사과,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대북 심리전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고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남측 정부의 ‘도발불용’ 원칙이 북한의 ‘유감’ 표명을 받아냈다. 남북 합의문에서 외교적으로 사과에 해당하는 북측의 ‘유감’ 표시를 명문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뢰 도발과 포격 도발에 대한 북측의 ‘사과’를 받아냄으로써 그동안 반복된 북한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여론을 잠재우고, 도발→위기→타협→보상→재도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냈다. 합의대로 당국 회담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하고, 이산가족 상봉과 민간교류를 활성화한다면 7여 년 동안 단절된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새로운 남북관계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남북관계 단절로 박근혜 정부가 표방했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번 남북대화에서는 안보와 통일 분야 책임자들이 만나 오랜 시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남과 북의 최고당국자들도 회담 내용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불신과 오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남과 북이 오랜 상호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합의 이후 북한의 유감 표명이 미흡하다, 재발방지 약속이 명시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등 불만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수사로 합의문을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합의 이행이다. 지금까지 남과 북 사이에는 많은 합의문을 만들어냈지만 대부분 사문화됐다. 합의 이후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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