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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베테랑이 이긴 네 가지 비결

중앙일보 2015.09.07 00:28 종합 34면 지면보기
권석천
사회2부장
정신병원 병동을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40대 여성 환자가 자신을 “XX그룹 OOO회장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진료부장은 병실을 나오며 말했다. “망상 장애입니다. 예전엔 아버지가 대통령,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이란 환자들이 많았어요. 요즘은 재벌 회장들이 등장합니다. 사회적 권력이 옮겨감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는 거죠.”



 영화 ‘베테랑’이 상정한 악역도 정치권력이 아니다.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범죄를 저지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체포하기 위해 상부의 압력과 싸워 나간다. 이 영화를 단순히 재벌과 경찰의 싸움으로 국한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세상의 을(乙)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 갑(甲)을 이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비결은 다음 네 가지다. (※스포일러 있음)



 1. 약점이 적어야 버틸 수 있다. 자신의 욕망부터 관리해야 한다.



 서도철의 수사를 막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감찰반을 보낸다. 서도철이 버텨낼 수 있는 힘은 그와 아내가 명품 백과 5만원권 다발의 유혹을 뿌리친 데서 나온다. 서도철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얼굴·체면)가 없냐?”고 반문한다.



 사실 우린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 나는 가오를 자존감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자존감은 스스로에게 ‘쪽 팔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욕망에 무릎 꿇으면 자존감은 무너진다. 약점을 쥔 자의 노예가 되고 만다.



 2. 갈고 닦은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프로는 변칙도 구사할 줄 안다.



 서도철 팀이 조태오 수사에서 배제된다. 형사들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총경(천호진)이 넌지시 말한다. “난 분명 주부도박단 잡아오라고 했다.” 수사팀은 도박 단속을 내세워 파출소에 대기하다가 팀원의 112 신고에 따라 조태오의 마약 파티 현장을 급습한다.



 올림픽 정신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현실은 프로들이 뛰는 월드컵이다.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만으론 상대를 이길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왜 진실이 통하지 않느냐”며 징징거리는 모습만큼 보기 힘든 것도 없다. 반칙에는 변칙으로 맞서야 한다. 변칙은 원칙 없는 꼼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3. 참고 또 참는다. 승부는 명분의 크기에 달렸다.



 드디어 서도철이 거리에서 조태오와 맞붙는다. 시민들이 스마트 폰을 들고 격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서도철은 조태오에게 연신 두들겨 맞는다. 피투성이가 된 서도철이 주먹을 쥐고 일어선다. “지금부터는 정당방위다.”



 한두 번 맞는 것으로 명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인정할 때까지 참다가 반격에 나서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그래야 ‘쌍피(쌍방 피의 사건)’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켜보는 이들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다.



 4. 혼자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가 필요하다.



 주인공은 서도철만이 아니다. 주저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오 팀장(오달수) 같은 동료들이 없었다면 조태오를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 서도철을 때려눕힌 뒤 도주하려는 조태오 앞을 가로막는 ‘아트박스 사장’(마동석)도 계셨다.



 개인기로는 끝까지 갈 수 없다. 우리의 희망은 ‘온 힘을 다해 일하면 자기 주위의 풍경이 변한다’(만화 『중쇄를 찍자』)는 데 있다. 진심으로 원하면 주위의 양심들도 공감할 것이다. 돈도 없고, 가오도 없어서 더 정의로울 수 있는 그들과의 리그를 짜는 게 승부처다. 서로의 작은 차이를 넘어서려면 절박해야 한다.



 ‘베테랑’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이 1100만을 넘어선 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있는지 말해 준다. 우리에겐 “‘베테랑’에 영감을 준 진짜 베테랑들”(류승완 감독 인터뷰)도 있다. 류 감독 말처럼 “침몰하는 배에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던 선생님”도 있었고, 메르스에 맞서 환자들 생명을 지켰던 간호사도 있다.



 이제 분명한 사실은 을들이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그들 속에도 베테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수 없다는 열망들이 조금씩 결집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권석천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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